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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본문
1. 외삼촌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2학년이 될 때였나. 집에 외삼촌이 함께 지냈는데, 그 때는 ‘삼춘’이라고 불렀다. ‘삼촌’은 좀 이상한 발음이라고 생각했다. 키 크고 잘생기고, 오빠와 나를 항상 재미있게 해 주고, 엄마완 달리 한 번도 우릴 혼낸 적이 없었다.
왜 외삼촌이 우리 집에서 지내는지는 몰랐지만, 나중에 대학교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외삼촌 방은 우리 집에서 가장 어두컴컴하고 작은 방이었는데, 거기에 들어가면 책상의 두 번째 서랍에는 성냥들이 가득했다. 성냥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 서랍은 늘 잠겨있었다. 나는 열쇠를 찾아 몰래 열고, 총알을 매단 목걸이며, 조선시대 엽전, 숟가락(?) 등 외삼촌의 보물을 보며 많이 놀라워했었다.
외삼촌은 안경을 썼는데, 어느 날은 안경을 두 개 겹쳐 쓰고는 자기가 뭔가 달라 보이지 않느냐고 물어봤었다. 나는 처음에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알고 나니 외삼촌이 너무 웃겼다.
“그럼 삼촌 어지러울 텐데?”
라고 물어보니 참고 있는 거라고 했다.
밥 먹을 때 보면 외삼촌의 안경에 반찬들이 비치는걸 보고 난 이렇게 생각을 했었다. 보이는 게 비치는 거면, 그 사람이 상상하는 것이 그 사람의 눈에 비칠 거라고.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가까이에서 뚫어져라 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그런 나만의 생각을 오랫동안 관철시킨 것 같다. 난 또 엉뚱하게도 라디오를 들을 때 스피커를 뚫어져라 봤었는데 그렇게 하면 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볼 수도 있다고 믿었던 거다.
외삼촌이 밥을 차릴 일이 있게 되면 트라이앵글을 치면서 우릴 불렀다. 그것도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외삼촌을 봤다. 난 외삼촌을 자랑했는데 마침 외삼촌이 안경을 벗고 있는 중이었다. 그 언니가 나중에 삼촌이 못생겼다고 말하는 거였다. 난 전혀 그렇게 생각을 안 했는데, 그 언니가 하는 말이 맞겠다는 생각이 왜인지 하여튼 들었다. 그래서 삼촌한테 그 얘기를 해준 다음 이렇게 덧붙인 거였다.
"그 언니가 그러는데 삼촌이 되게 못생겼대 … 어쩌고저쩌고 … 그런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못생겼어. 하하하!"
사실 그런데.. 다음에는 난 그렇게 생각한 적 한번도 없는데 라고 할 참이었는데 말이 그렇게 나왔다. 악마의 장난이었겠지!
그 때 삼촌 표정이 아주 안 좋았다. 예민한 청년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준 거다. 그것도 귀여워하는 조카가 배신 때렸으니. 그 뒤로 삼촌이 내가 갖고 싶어 하는 '책 받쳐놓고 보는 거' 사주고 나서는, 삼촌이 졸업을 한 건지 그 뒤부터 우리 집에서 지내지 않았다는 기억만 있다. 이 후로 외삼촌과는 전과 같지 않은 게 확실하다. 내가 너무 큰 상처를 주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지만 대학생이면 아직 성인은 아니었을 수도 있고, 성인이라고 해도 인정할 수 없는 상처였던 게 분명했을 걸. 으흑흑 외삼촌 미안혀~~!
난 사실 한번도 외삼촌이 못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구!!
2. 친구에게 처음으로 받은 선물
연필꽂이 정리를 하다가 난생 처음으로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 나왔다. 국민 학교 2학년 때, 내 뒷자리의 조영혜라는 친구가 준 은색 반짝거리는 포장지로 싼 노란 자그마한 연필꽂이였다. 반짝이는 포장지와 샛노란 색깔 때문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상업은행이라고 쓰여 있다.
그래도 그건 굉장한 거였다. 포장이 되어 있었고 반 아이들의 선망의 눈빛들도 있었으니까. 이 건 연필도 몇 개 안 꽂히는 애물단지였다. 하지만 그 기억 하나로 버텨온 물건이다. 지금은 버렸다. 그래서 기억도 따라 사라졌지만 내 노트의 한 구석에는 적혀있다.
어렸을 때 아빠가 엄마는 사주지 말라던 병원놀이를 사다 준 게 아마도 내 기억이 살아있는 첫 선물일 것이다. 그리고 4학년 때인가 유옥종이라는 자신을 독종이라고 별명지었던 아이가 준 학 100마리도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서 미안하지만 마음 속에는 그 때의 그 기쁜 마음이 남아있다 싶지만, 며칠 전에 우연히 이 친구를 보았었기 때문에 생각이 났다.
3. 이선
국민 학교 4학년 때 '이 선' 이라는 아이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아이는 반장을 도맡아 하는 썩 괜찮은 아이였다.
지금도 그 아이의 얼굴이 생각난다. 약간 검은 얼굴에 주근깨와, 주로 입고 다니던 청치마가.
받은 편지가 준 것보다 많았다. 내 서랍이 꽉 찰 정도로 글씨나 편지지, 내용 모두 감동적이었다.
친하면서도 이선네 집에 놀러 간 건 딱 한번뿐이었다. 그것도 잠깐 구경만 하고 바로 나왔다. 집은 무척 작았지만 향기가 있었다. 앉아서 쓰는 책상밖에 없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나는 친구들을 데려와 하루 종일 놀고는 집에 데려다 준다며 또 놀았는데 그런 면에서는 노는 방식이 나와 달랐다.
그 아이는 집에서 차별을 한다거나,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다거나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좋아하는 남자애가 전혀 없었던 걸 보면 그 애는 좀 성숙해 보였다. 그리고 그 애가 좋아하는 남자애는 내가 싫어하는 애이기도 했다.
어느 날의 편지는 눈물로 얼룩져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펜이 다 번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울면서 썼다는 사실과, 글씨가 번져서 멋있는 효과를 내는 점에 나는 굉장히 놀랐다. 나는 생각했다. 이 편지는 엎드려서 썼을까, 아님 책상에 앉아서 썼을까? 눈물이 잘 떨어지려면 얼굴에 닿아 흐르는 것 보다는 엎드려서 바로 눈물이 떨어지도록 하는 게 빠른 방법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한 번 따라 해 보려 했지만 그 정도의 눈물이 나오지가 않았다. 나도 한 번 울면 그 양이 남들은 따라오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이 효과는 내기가 정말 힘들었다.
이런 멋있는 편지를 엄마에게 자랑했지만 시큰둥하던 반응이라니, 원래 엄마는 성적 같은 게 아니면 시큰둥했다. 정말 꼴값이라며 버리라고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그려준 그림을 다른 애와 보며 웃었을 때와, 갑자기 차갑게 대했던 모습은 내게 상처를 주었다. 이선은 곧 사과했지만 난 영문도 모른 채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속으로 멀리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6학년이 되기 전에 전학을 갔고, 지금은 그 아이의 편지가 단 한 개도 없다. 아마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내가 다 버렸을 거다.
어쩌다 슬픈 책을 보다가 책 귀퉁이에 눈물이 떨어질 때 그 특수효과가 생각난다.
4. 이지은
처음으로 편지를 쓴 건 국민 학교 1학년 때다.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 이지은이 제주도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었다.
지은이의 편지가 오면 나는 답장을 했다. 내가 쓰는 방식은 이랬다. 지은이의 편지를 옆에 놓고, 묻는 말이 있으면 모조리 답하는 방식이다.
“거기도 날씨 좋지?”이런 인사말 하나에도 물음표가 있으면 좋다고 꼭 대답을 했다. 엄마가 지적해 줄 때까지는 이렇게 편지의 목적에만 충실했다. 지은이가 내 방식을 따르지 않아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넘어가기에 그 후부터는 엄마의 지적대로 나의 이 기본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지은이는 나름의 편지 쓰는 방식을 갖고 있었다. “…단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가 예쁜 인형을 사주셨단다.”라든가.
그러다 연락이 끊겼는데, 서울로 이사를 갔다던가. 서울로 이사 가고 나서는 나를 잊은 모양이다. 섭섭하다. 나로서는 연락할 만한 어떤 방법도 모른다.
그 아이는 예쁘고 착했다. 우린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지은이와 피아노 학원도 같이 다녔고, 말도 잘 통했다.
어느 날은 학원 끝나고 같이 집으로 오다가 '천천히'라는 표지를 봤다. 그래서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왔는데, 알고 보니 차를 두고 한 얘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우린 시골에 ‘내려간다.’라는 표현 때문에 토론하기도 했다. 시골 가는 길이 내리막길이 아닌 이상 내려간다는 표현이 이상하다는 게 내 주장이었고, 지은이는 부모님이 '내려간다.'고 했으니 오르막이던 내리막이던 상관없이 시골에 가면 내려가는 게 맞을 수밖에 없다는 요지였던 것 같았다. 부모님 말이 틀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부모님의 권위로 옳고 그름이 가려질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밖에 말하지 못하는 지은이에게 화도 조금 난 게 사실이다.
지은이는 가정교육도 올발라서, 나는 흙장난도 많이 하고 더럽게 놀기도 했는데 그런 지은이의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하여튼 동네 애들과 흙장난하는 파에 지은이는 없었다.
당시 멋쩍은 기억이 하나 있는데, 내가 손등에 볼펜으로 잔뜩 그림을 그리면서 놀다가 지은이네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지은이네 엄마가 내 손을 보고 놀라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이상한 기분이라니. 지은이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지, 날 이상한 애라고 생각할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은이네 집에선 아빠가 출근할 때 동생이랑 함께 인사를 무슨 90도도 아니고 110도 정도는 하는 것 같았다. 정말 굉장한 의식이었다.
엄마가 어느 날 밖에 나가서 그만 좀 놀고 지은이처럼 집에서 책 보며 깨끗이 놀라고 해서 놀랐었다. 기분이 나쁘고 독기가 올랐다. 집에서만 놀 수 있는 삶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 뒤로 밖에 잘 안 나간 것 같다. 본래 독기가 오르면 절대 바꾸지 않고 그대로 하는 성격이다. 그건 기억나지 않는 어릴 적의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엄마가 말해 주어서 알게 되었는데, 내가 어릴 적에 옆집 언니네에 매일 놀러 갔다고 한다. 그 언니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큰 어른이었다. 내가 매일 놀러 간 걸 보면 분명 재미가 있었을 거다. 엄마는 매일 아침 나를 잘 씻기고 옷 갈아 입혀서 그 집에 보냈는데, 어느 날 한번 세수도 안 시키고 그냥 보냈다고 한다.
그 언니는 나한테 세수를 안 하니까 밉다고 했단다. 세수를 하는 습관을 갖는 게 좋다는 걸 말하려 한 것이었을 텐데 그 후로 그 집에 절대로 안 갔다고 한다. 그 언니가 찾아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다시는 안 갔다고 하니 웃기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세수를 안 해도 나를 예쁘게 생각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싫다.’
라고.
다시 지은이 얘기로 돌아가서, 그 애는 그 모습 그대로만 자랐다면 지금쯤 어디 명문대라도 다니고 있는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가 되어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만 어긋났군.
국민 학교 때 글짓기 대회 같은 데에 나갈 수 있었던 건 - 상을 받은 적은 없지만 - 지은이와 주고받은 편지 덕분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지은이의 편지는 역시 한 개도 없지만 아무튼 편지라는 것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신비스런 물건이다.
5. 미국 달러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거다. 우리 반 남자애 한 명은 근처 절에서 사는 고아였다. 어느 날은 절에 사는 스님이 미국에 다녀왔나 보다. 미국 얘기를 자기가 막 신나서 한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게 말하는 거다.
“1달러가 700원인가 800원이라는데 맞지?”
순간 당황스러운 나. 전혀 모르는 분야인데도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아, 응. 700원 정도 하지.”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이러면서 주위 애들에게 으스댄다. 그런데 왜 내가 확인해 줘야 했을까? 내가 공부 잘하는 아이였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 때 처음 알았다. 1달러가 우리나라 돈으로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그렇게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요즘 절에는 키워지는 고아가 별로 없다고 한다.
6. 생일이 빠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태어났던 의정부를 떠나서 이곳으로 이사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어린이집도 몇 달 다녔는데 늦게 들어와서 그랬는지 그 때 나만 교과서가 없었고 졸업식 할 때가지 다니지도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양치질 하던 재미있는 일들도 있고, 마지막 날에는 색연필 등을 모두 내 자리에 놔두고 와야만 했던 기억, 말 걸기 무서운 어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애가 내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집에 신문처럼 매일 배달되는 아이들용 아이템풀은 오빠거지만 오면 내가 다 해놓았다고 한다. 따로 글자를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배워서 책 보는 걸 좋아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아이스크림 겉 봉에 써 있는 글자를 소리 내서 읽어 본 그 순간. 그리고 환하게 트여오는 글자가 있는 세상.
학교에 정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보니 항상 놀던 동네친구들이 어디론가 몰려간다. 평소에는 늘 같이 놀던 애들이었지만 그 애들은 그냥생들이고 나는 빠른 생이었다. 그래서 그 애들은 1년간 더 그러고 놀아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지루하고 시간낭비 하는 걸로 보였다.
7. 학교에서 있었던 일
1학년 때다. 애들이 떠든다고 선생님이 모두 엎드려서 자버리라고 했다. 잠시가 지났을까? 선생님이 애들 모두 일어나서 가서 세수를 하고 오라고 했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나를 깨웠지만 그대로 자는 척을 했다. 세수를 하고 애들이 모두 돌아와서 나를 다시 깨워서 그 때야 일어났다. 나만 자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잔 게 아니었다. 일종의 반항, 용기 뭐든. 자버리라고 한 것은 선생님의 지시고, 졸리지도 않은데 세수하라는 건 정신 차리라는 뜻인가? 이건 만6살 꼬마를 어른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떤 쇼보다 웃긴 쇼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그 당사자인 어른더러 힘든 시간을 보내라고 권유하지 않았다. 힘든 시간을 제공한 게 우리들이고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체벌에 반대한다. 체벌은 전혀 효과가 없다. 아이들은 잘못을 할 수 있다. 물건을 깨뜨리고, 소란과 야단을 피운다. 그들은 인생을 좀 더 맑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야는 좁은 편이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편견에 물들어버리기 쉽다. 그 모든 잘못은 처음부터 잘못은 아니었을 것이다. 체벌로서 당사자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행동을 개선하려는 자발적 의지가 아니라, 부당함일 뿐이다. 신체적 아픔이 그 순간의 고통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고, 다른 행동의 개선에 초점이 맞춰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잘못하지 않았냐고 우겨봤자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는 척만 하는 것일 뿐이다. 어른들은 왜 저렇게 화를 낼까 궁금하기만 하다. 그들은 아이들을 이해시키려 애쓰지도 않는다. 원래 이해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하는 거다.
1학년 때의 기억이 몇 가지 더 있다.
아파서 학교를 못 간 사이 엄마와 색종이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학교에 가서 그 목걸이를 하고 엄마역할로 연극을 했다. 모든 조가 안 한다고 하자 선생님은 한 팀이라도 연극을 하면 이번 시간에 수업을 안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조 애들의 바람을 무시하고 자원했다. 마땅히 스토리도 없는 마당에 엄마 역을 맡은 내가 딸 역에게 공부하라며 엄포를 놓는 장면을 연출했다. 우리 엄마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다. 아마도 선생님은 그 뛰어난 관찰력을 지녔기 때문에 오해를 했겠지.
그런데 선생님은 약속과는 달리 수업을 했다. 그래서 너무나 열 받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님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우리 반에서 목소리가 제일 크고 발표도 잘 한다고. 나는 그 후로는 발표 같은 것을 하기도 싫어졌고, 목소리가 크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에 대한 장점도 무시하게 되었다.
또 나는 잘 아팠는데, 고열로 양호실에 있다가 교실로 가겠다고 우겨서 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토해버렸던 일이 있었다. 선생님이 다 치웠다. 다 치워진 그 자리에 내가 발도 못 대자 선생님이 내가 토한 덴데 왜 그러냐고, 자기는 다 치우기까지 하지 않았냐며 뭐라고 했다.
그랬다. 학교는 집이 아니었다. 내 손으로 그걸 치우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사실 그걸로 고민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자기가 치우기는 너무 싫었겠지. 하지만 내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그 말을 못했겠지.
3학년 때 어떤 남자애는 토사물을 본인이 직접 치워야만 했다. 정말 역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전에 은행에서 일 할 때 이 애를 본 적이 있다. 눈이 마주쳤다. 많이 성인 남자다워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난 이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나는 체육시간인데 치마를 입어서 철봉을 하지 않으려고 꾀병을 부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치마 입은 나를 철봉에 오르도록 했다. 거의 모든 남자애들이 그 광경을 놓칠 리 없었다. 남자애들에게 둘러싸여 눈물을 흘리며 나는 철봉에 매달렸다.
2학년 때 잠깐 하고 사라진 남자아저씨 교사는 성추행 얘기도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에 있는 개똥을 손으로 떠서 학교 담 넘어 길에 던져 치운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모래와 함께 떴다. 그 때 어떤 애가 "욱"이라고 외마디 소리를...) 그 교사가 가고 나서 온 여자아줌마 교사는 반년간 평범하게 가르쳤을 뿐이지만 내 생애 최고의 교사로 기억될 정도다.
8. 엄마의 어릴 적 얘기
엄마가 어릴 적 그 외갓집에는 엄마의 고모들을 비롯한 대가족이 살았다고. 엄마가 소풍 가는 날이었는데 무서운 할아버지는 뭐 사 먹을 단 돈 10원도 안주셨다네. 불쌍한 우리엄마 장독대 뒤에서 울고 있었는데 고모가 20원인가를 주기에, 기쁜 마음으로 모두가 등교해버린 텅 빈 시골길을 좋다고 달려 내려간 아름다운 추억.
엄마의 할아버지는 남자애인 외삼촌에게만 한자를 가르쳐 주셨다고 하네.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 우리 아빠를 참 좋아하셨단다. 대체 왜 그러셨을까?
엄마아빠가 결혼하고 나서 아빠를 좋아한 여직원이 편지를 보내와서 싸운 적이 있다고 한다. 아빠는 그 여자가 혼자 좋아했던가 보라고 했다는데 그 때 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바뀌었을 수도 있구나. 아니 엄마가 바뀌었다면 과연 나는 존재하고 있을 것인가 아닐 것인가.
9. 재수없는 교사
5학년 때 담임이 최악의 1인자다. 갓 부임한 여자교사였는데 긴 머리를 파마한 게 기억에 남는다. 미술시간에는 자기를 그려보라고 요구해서 뻥 진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제일 잘 그렸다고 애들이 추천했는데 자신을 좀 더 예쁘게 만화처럼 그린 그림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지만 아이들이 반대했었다. 그 때 상이 초콜릿 한 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리면서도 정말 그리기 싫어서 속으로 역겹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그 교사가 혼자 자취한다고 김치도 담아주고, 집에 초대해서 먹을 것도 해줬는데 그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엄마만 모르고 있었다. 그이는 그 김치를 다른 교사와 나누었다. 나누는 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엄마는 이 사실을 알고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도 안 좋게 생각을 하고 있다. 내 주관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 엄마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자기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고, 그 감정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라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그 선생이 조 별로 나눠서 자기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아이들은 뭐라도 가져갔는데 우리 조 차례가 되자 자기는 술을 좋아하니까 술을 가져오란다. 우리 조 아이들은 신나서 집에 있는 미니술병을 위스키니 브랜디니 조금씩 가져왔다. 그런데 되려 혼이 났다. 자기는 장난으로 말 한 건데 일부러 가져왔다나? 부모님이 자기를 뭐라고 하겠냐는 거였다. 우리는 만9세의 꼬마였을 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순수해서 정말 미안했다.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들고 해서 그 집을 떠나 무슨 아파트로 간단다. 그 아파트에는 연구원 독신남들이 많이 살아서 좋단다. 애들 앞에서 할 말인가 싶다.
그 당시 예뻐하는 남자애가 있었으면서 자기는 차별 안 한다고, 차별한다는 말 들을까 무서워서 애들 눈 안마주치고 일부러 먼 데를 바라보거나 교실 벽 바라보면서 수업한다나?
반 애 중에 한 명이 자신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낸다고 해서 나도 보내봤다. 그 애가 어느 날은 선생님이 답장을 안 쓴다고 불평하기에 나는 되려 선생님한테 이런 내용을 덧붙여서 보냈다. 선생님은 어른이고 바쁘니까 답장 써주기를 바라지는 않고 나는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에게 편지를 쓸 뿐이라고. 그러자 수업시간에 이런 말을 한다. ㅇㅇ이가 편지에 쓴 이 말은 정말 맞는단다. 어른에게 답장을 바라는 건 안 된다나? 속으로 엄청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결론적으로 이런 선생이 있는 학교는 더욱 엿 같은 곳이된다. 자연히 공부도 점점 못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학교는 입학하고 나서 해가 갈수록 싫어지기만 하는 그런 곳이었다.
글을 알고 입학했으니까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었던 거고, 새로운 게 나오면 수업시간 내에 모두 외워졌고 그 날 내에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하는 것을 스스로 자연스럽게 알아서 했기 때문에 공부를 잘 했던 것뿐이이지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불성실함 덕분에 도움 받은 적이 있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담임이 문제집을 한 권을 전부 풀어오라고 한 적이 있다. 상위권 몇 명만 다 풀어와서 집에 갔지만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 풀지 못해서 자리에 남았다. 난 2~3장씩 넘겨가는 수를 쓰면서 문제집을 풀어 얼른 집에 가려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 그런 수를 쓰지 않아도 될 뻔했다. 나를 제외한 아이들 거의 대부분이 너무나 느렸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냥 우리를 보내줘 버렸다. 괜히 술수를 부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답을 맞춰보면 거의 틀렸다. 정말 맞는 것 같은데 틀렸다는 거다. 그렇지만 따로 찾아보며 공부할 생각도 없었다. 답안지가 틀렸을 거라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문제집이라는 권위 있는 출판물이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 때는 감히 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 문제집을 거의 안 풀고 시험을 봤더니 또 1등이다.
상위권 몇 명이 항의를 한다. 문제집에서는 이렇게 안 나왔어요. 선생님이 그 때서야 문제집을 보니까 답이 틀렸단다. 그 문제집은 그런 에러로 가득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문제집을 선택하고 풀게 한 책임을 져 버린다. 자기가 가르쳐 준 대로 하는 게 맞는 거지 문제집에 의지하냐고? 나한테도 물어보셨다. 너는 어떻게 다 맞았니? 저는 그냥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풀었어요.
불성실한 덕분에 또 성적이 잘 나온 그런 아름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