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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사람, 임동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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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일을 붙들고 배꼽 밑으로 내려와 이 뭐꼬의 바다에 빠뜨린다. 기쁜일을 붙들고 배꼽 밑으로 내려와 이 뭐꼬의 바다에 빠뜨린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일어나는 모든 것을 붙들고 배꼽 밑으로 내려와 이 뭐꼬의 바다에 빠뜨린다. 무엇이든 배꼽 밑 이 뭐꼬의 바다에 빠뜨리기만 하면 그것은 죽어간다. 이와같이 철저한 죽음을 먹고 나의 이 뭐꼬는 힘이 붙었다.
떨어지는 사과를 포착한 그 상태가 중요하다. 말하자면 '환하게 불이 켜진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각성의 상태다. 그렇다면 그 각성은 어디서 올까? 무념무상에서 온다. 무념무상, 즉 몰아의 상태는 어디에서 올까? 바로 지극한 염원에서 온다.
에디슨에게는 늘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획기적인 물건을 만들겠다는 절실한 염원이 있었고, 뉴턴에게는 만물의 법칙을 규명하겠다는 원대한 염원이 있었다. 염원은 몰입니다.
사람이 살면은 몇 백년이나 살더란 말이냐
죽음에 들어서 남녀노소 있느냐
살아생전에 각기 맘대로 놀거나
우리춤의 명인 이매방, 명창 성유향, 김수연, 가야금 명인 백인영, 입으로 부는 모든 국악기의 명인 이생강, 정악대금 명인 박용호, 승무명인 이애주, 동해안굿 명인 김석출
정악은 자연을 닮은 음악이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툭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가락으로, 마치 가없는 쪽빛 허공과 같다. 단소로 연주하는 청성곡을 들어보자. 소리가 맑다. 소리를 맑게 들었다는 것은 정신이 맑아졌다는 증거다. 맑음의 세계...
투명한 하늘처럼 맑아진 상태. 그렇게 맑아지기 때문에 저절로 삶이 관조된다. 삶이 관조된다는 것은 삶은 삶 그 자체로 흘러가고 나는 그 흘러가는 삶을 그저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로움의 경지요, 아름다움의 극치다.
그에비해 민속악은 인간의 희로애락이 서로 비벼져 흥으로 풀어져나오는 가락이다.
경기민요는 아주 우아하고 세련됐다.
전라도로 가면 눈물이 뚝뚝 떨어지게 애간장이 끓는다. 반면에 경상도는 아주 단순하고 발랄하고 힘이 있다. 한편 강원도 민요에는 그 높고 깊은 강원도 산속의 고독한 정서가 그대로 녹아있다.
그래서 민속악은 솔직함이 생명이다.
정악이 꿈이면 민속악은 현실이다. 꿈은 현실을 통해 익어가고, 익어가는 꿈은 현실을 통해 살아난다.
황태중임남
이렇게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하거나 듣게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도 그와같이 풀어지고, 평화롭고 따뜻하고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 음악에 대해 천상의 음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는 중광지곡과 똑같은 다섯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경기민요 노랫가락 창부타령을 들어보자.
피아노 연주의 자유로움을 터득하지 않고 이러한 음악을 작곡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논어를 읽으면서 그렇지 무릎을 쳤다. 가슴이 툭 터졌다. 한 구절 한 구절 모두 내 얘기였다.
소리만 내고있지 혼이 없었다.
내 경험으로 3일이 지날 때까지 소리 속으로 혼이 들어가지 않으면 피아노는 끝이었다.
나는 공부를 해오면서 터득한 게 있었다. 뭐든지 꽂혀서 열심히 하면 두 달이면 결판이 난다는 거였다. 계속하거나 그만두거나.
사람을 아는 공부가 공부의 전부이다. 그리고 나를 아는 공부가 곧 사람을 아는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