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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일기

과거는 과거

사랑스런 터프걸 2017. 11. 17. 11:49

오래전에 '국민학교'라고 포스팅을 했었다.
지금은 거기에 추가하며 학교 때의 모든 것을, 그 때 안 적었던 것을 적으려고한다. 근데 쓰려니 되게 피곤해지네. ㅋㅋ 생각조차 하기 싫은가보다. ㅋㅋ
왜냐하면 그래야 머리가 시원하게 비워질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나는 게 싫다. 졸업도 했고. 새로운 걸 받아들여야 하기에. 라고 하기엔 엄청 오래전인데~
근데 진짜 생각이 덜어지면 생각이 안 날 수도 있을까? 시험삼아 해 본다. 
적고보니 즐거운 기억은 별로 없네. 아마 부정적인 기억이 더 오래 남기에 그럴수도.
아무튼 나름 꽤 가혹했다. 그래서, 이런 나의 잘못된 선택이나 실패가 싫어서 다른 사람들을 따라하면 그런 게 없고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해서 더욱 어리석게 살게 되었다.


사고를 보면 119를 불러야지

2013년도 겨울이었나. 출근하다가 버스에서 사고가 나는 걸 보았다. 내리막을 내려오던 차가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통제를 잃었고, 운전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달려오던 차가 미끄러지고 있는 그 차를 박아버렸다. 운 나쁜 건 바로 그 차였다. 그 차는 통제를 잃은 차를 갓길로 밀어놓고는 자신은 중앙선을 넘게 되어 2차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버스의 신호대기 중에 그 모든 장면을 봤지만, 왜 바로 신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누군가는 하겠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했어야 했다.
난 남편이 낫으로 손가락 뼈를 베었을 때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다.
어릴 때도 누군가 오빠한테 올라타서 돌로 머리를 찍어내리고 있는 장면을 봤는데,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난 악마인걸까? 그 순간 생각이 마비되었는데,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노영두의 생일파티

언제였는지, 짝의 생일파티가 있었다. 
나름 재미있게 지낸 녀석이었지만, 사회책에 나온 사진을 자꾸 동양백화점이라고 맞지 이러면서 나에게 강요했다. 난 동양백화점을 가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긴 지 몰랐지만 아닌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자꾸 맞다고 말하라고 압박해오는 것이었다. 할수없이 지친 내가 맞다고 했더니, 바로 애들한테 쟤가 이게 동양백화점이래하면서 웃긴다고 그러는 거였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그 동기가 무엇일까? 그 때 그녀석도 참 어리석었나보다.
그 성가심이 너무 싫어서, 생일파티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가 포장해 준 공책을 들고 갔다. 그런데, 당시 선생님이 진정한 선물은 본인이 아끼는 걸 주는 거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나는 아끼는 물건도 없어서 그냥 과자먹으면 들어있는 손가락만한 작은 인형들을 상자에 넣어서 포장했다. 이걸 줄려고 한다니 엄마는 말렸지만, 생일축하한다는 쪽지도 곁들였다. 왠지 사실은 널 좋아해 같은 비밀스러운 쪽지를 넣으면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므로 쓰지 않았다.
파티 후 선물을 풀러보는 시간에 애들이 내 선물에 모여들어 쪽지에 별 다른 얘기가 없자 에이~ 이랬다. 다행이다. 이상하게 애들이 기대한 것도 내가 알고있었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이런 얘기를 듣게 됐다. 내가 진짜 거지같은 것들을 아끼는 거라며 주었다고. 난 공책도 가져갔는데, 그런 얘기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그런 오해가 있었다. 하지만 굳이 바로잡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널리 퍼졌고, 그건 귀찮고 힘든 일일 것이었다. 사실은 있다. 그건 있는거니까. 그걸 아는 사람도 있지만 굳이 바로잡아주지 않았다면, 나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녀석은 전학을 갔다. 당시 뭔가 전학을 간다는 건 멋지게 생각되었다. 우린 나름 짝꿍으로 즐겁게 지낸 적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본체만체 가게 되었다. 오히려 친했나 싶은 다른 아이와는 아주 반갑게 헤어지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엄마가 옆에 있었고, 나는 그 엄마가 왜 애들을 꼬집고 다니냐며 나를 꼬집은 적이 있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인사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기왕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둘이 돌아다니고 있었던 건데, 그런 행동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선물을 줬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 당시엔 그렇게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오래 산 부부가 이혼을 하는 경우. 더 친하지 않은 사람과 더 친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 경우. 말 한마디라도 더 하고, 같이 오랜 시간을 나눈 사이도 서로 안 보고 싶어하는 경우.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정말로 사람사이라는 건 뭘까? 그런 생각을 하게 했던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답은 지금도 모르겠다.


이현주

이어서 생각이 나는 일이다. 이 아이와 언제부턴가 같이 다녔다. 나보다 키도 크고, 아 그 당시 나보다 작은 아이는 없었다. 청치마도 예쁘게 입고 다니는 멋진 여자였다. 나는 피아노학원을 다니는 게 싫었는데, 그 애와 함께 다녔다. 그 애는 늘 먼저 레슨받고서 놀기를 강하게 원했기 때문에 양보했었다. 그런데, 같은 반인데 어느 날부터 하교 할 때 그 애가 없었다. 학원에 가보면 먼저 있고. 며칠을 오리무중에 빠졌다. 물어봐도 그냥 먼저갔어 이러고. 알고보니 그 애는 종례를 하지않고 가는 거였다. 그게 다 나보다 먼저 레슨을 받으려는 속셈으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도 총알처럼 나갔다. 혼자 막 급히 가고 있는 그 애를 불렀다. 정말 죽을만큼 불렀다. 뒤돌아보지 않고 막 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해 주었다. 걔보다 더 빨리 나왔고, 그래서 걔가 나를 막 따라오면서 불렀다. 난 들은척도 안했다. 그런데 학원에 가서 난리부르스를 부리는 거였다. 울며불며 내가 못들은척을 했다고 통곡을 하는 거였다. 나는 너도 그랬잖아. 라고하니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사과를 종용했다. 절대 하고싶지 않았는데, 주변에서도 내게 종용했다. 너무 미친년처럼 울고불고 하니까. 걔도 나한테 하는 말이, 미안하다고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자 그 애는 깨끗하게 다시 친구로 돌아왔다.
하지만 난 마음 속에서 저런 싸이코 같은 년과 아무것도 함께 하고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내 마음을 표현할 방법도 대상도 몰랐고, 답답하기만 했다. 걔도 전학을 갔고, 당연히 인사하러 가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저게 트라우마로 남아서 생각나면 눈물이 났다.
전에 강아지 호텔사건에서도 보면 그들입장이 서로 다른 얘기들을 한다. 진실은 본인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그저 그런 양심으로 살든 안 살든 본인의 선택인데, 양심 지킨다고 삶이 특별히 크게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겠지만. 글쎄. 본인은 알텐데 라고 생각이 들면 헛웃음만 나온다.
중학교 때에도 3년 내내 같이 다닌 애 이름도 같았다. 그런데 그 애와도 마지막이 그저 그랬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등하교를 함께 하고 많이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완전히 질려버린것 같다. 나쁜의미로 질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 새로운 사람을 찾고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을 것이다.


만들기 호구

난 늘 미술시간이 즐거웠다. 미술학원은 한 달 다녀봤는데, 그림 그려서 대회에서 메달도 많이 받았다. 오히려 반에 미술학원을 다니는 애보다 잘해서 의외의 아이 그런거였던 듯. 언젠가는 대회용 그림을 집에서 그릴 때 엄마에게 논의 모를 표현해달라고 했는데, 선 세개를 표현한 게 너무 좋아보였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내가 그렸어야 하는건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그 그림은 상을 못 탔고, 왠지 그 모를 그린 게 어른이 도와준 티가 나서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간파하다니 역시 전문가들인가보다. 
번거롭기는 했어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뒷자리 애는 늘 못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해왔다. 이렇게 해 라고 알려주면 그래도 못하겠다며 쉽게 포기해버렸다. 그래서 결국 내가 다 만들어주었다. 내 것의 품질은 최상. 그 애것의 품질도 상으로 만들어주어서 그 애는 굉장히 만족해했다. 그런데 몇 번을 그러다가 내가 발견한 것은, 미술시간만 되면 그 애는 늘 내게 도와달라는 명목으로 다 맡겨버리고 애들과 즐기는 거였다. 나도 내 걸 다 만들고 나면 즐겼었는데,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는 거였다. 선생님이 감시할까봐 내 걸 걔한테 들고있으라고 하고 나는 걔 걸 만들고 있었는데, 억울해지는 거였다. 그래서 다음에는 도와달라는 걸 깨끗하게 거절했다. 사실 나도 걔한테 다음부터는 네가 좀 해야한다고 말했을 건데, 걔가 안 들은 거다. 당연히 걔는 울상에 당황스러웠겠지. 하지만 다른 애들한테 도와달라고 해도 그 애들은 하나를 다 처음부터 해 줄 능력이 없었다.
그랬더니 내게 돌아온 건 욕이었다. 뒤에서 다른 애들에게 나는 도와달라는 말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아주 나쁜 년이라고 욕하고 다녔다. 그런 것쯤 신경쓰지 않았지만, 사람이 저럴수도 있구나. 참 이른 때에 그걸 경험했다.

난 할머니의 손녀이기에 베풂에 대해 부모님의 어마어마한 4년에 가까운 수업료를 내고 배웠는데, 베풂은 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은 고마워하지 않아. 남아도는 네 능력이었다 가벼이 생각하지. 고마워하기는 커녕 도리어 나를 증오하거나 배신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준 사람이 더 오래 기억하게 된다는 점도 짜증스럽고.

무재칠시나 마음껏 베풀자. 이건 뭐 쉬운줄아니? 


엎드려 뻗쳐

난 운동을 잘 하지 못했다. 국민학교 6학년 내내 몸무게가 10키로 밖에 늘지 않았다. 1학년 때 20키로로 입학해서 6학년 때 30키로였으니. 키도 엄청 작았다. 운동을 잘 못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키 작은 애라고 다 못하는 건 아닌데도. 
4학년 때, 하루는 담임이 없어 옆반 담임이 맡은 날이었다. 체육을 하는데, 뜀틀에서 못한다고 하자 엎드려 뻗쳐를 시켰다. 그래서 울었다. 챙피했고, 못하는 게 왜 죄인지 모르겠어서 억울했다. 그리고는 뜀틀을 했다. 그 선생 앞에서는 뛰어야만 했다. 뛰는 것 자체가 나는 챙피했다. 울면서 뛰었다.
못해도 해야하는 걸 말없이 보여준 그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중학교에 들어간다는 건 되게 설렜다. 머리도 단발로 자르고, 가방과 노트도 새로 사고, 교복도 입으니까. 
1학년 때는 한학년 위인 오빠 담임이 영어선생이었다. 오빠는 그 전부터 달리기 등 운동을 잘했고, 중학교 때도 계주를 한 것도 같다. 영어선생이 괜히 오빠 반에 가서 내가 예쁘고 공부도 잘한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인나머지, 맨날 오빠 친구들의 염탐또는 놀림에 정신이 없었다.
2학년 내내 키가 10센티는 자랐고, 3학년 때도 역시나였다. 너는 키가 크는 게 보였다 이런 소릴 들었다. 다들 어떻게 키가 컸냐고 했는데, 일부러 먹을 걸 먹었다. 원래 식욕이 없었기에. 

하 이상하게 고등학교랑 대학교 시절은 쓸 게 없네 ㅋㅋㅋㅋㅋㅋ 생각나는대로 추가해야겠다. 생각해보니까 10년 전에도 한 번 이렇게 지금까지의 인생을 정리하겠다고 덤볐었다. 근데 딱히 정리할 것도 없는데, 왜 머릿속은 기억을 붙잡아두려는 뭔가가 있는 것 같지? 


회사다닐 때

지점장이 통장정리를 하라고 거의 10개 가까이 주대. 그걸 정리하다가 하나가 겹쳐서 기장된거야. 근데 임마가 하는말이 ㅋㅋ 그거하나 제대로 못해서 어쩌냐며 찌푸리대? 참나. 앞에 언니가 재빨리 번개같은 속도로 새로 만들어 드렸는데, 그때 받아치지 못한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진상고객이시네여? 등. 내가 죄송해여 라는 말은 안 한 것 같다.

상사가 소리를 지른 적도 두 번? 근데 내 느낌은 말이지. 내가 혼나야 되서 혼난 건 아닌 것 같다이고, 그들이 리더의 고자세만 알지, 팀 배려의 리더쉽은 없다라는 것이다. 배려할 게 뭐가 있겠어, 지들도 굽신댈 놈 있다 이거아냐 ㅋ 그놈의 꼬추우대정책의 우리나라 회사들. 큰데나 작은데나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