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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 붓다의 치명적 농담 본문

책/200

한형조 - 붓다의 치명적 농담

사랑스런 터프걸 2022. 1. 6. 13:45

저자 정보 (2011)

저자 : 한형조
저자 한형조는 동해안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띠풀로 덮인, 동아시아 고전의 옛길을 헤쳐왔다. 『조선 유학의 거장들』『왜 조선 유학인가』『왜 동양철학인가』『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주희에서 정약용으로』를 썼고, 콘즈E. Conze의 『불교Buddhism』와, 카마타 시게오鎌田茂雄의 『화엄의 사상』을 번역했다.


이들 작품은 지금은 쓰이지 않는 한문인데다, 불교한문은 중국 고유의 한문과는 용어나 어법, 체제가 전혀 다르다. 게다가 이 번역은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의 맥락을 충분히, 그리고 의미를 정확하게 전해주지 못한다. 현장이 굳이 인도로 떠난 것도 그 때문.
지식은 경험으로 확인되어야 생명력을 얻는다.
나와 남을 갈라보는 뿌리깊은 습관
matrix세계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은 이전의 한자어나 우리 고유어가 아니라, 일본이 서구의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새로 창안한 번안어들과 거기 걸맞은 어법을 주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반야는 prajna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소리 그대로 읊어놓은 것입니다. 열반도 마찬가지이지요. nirvana라는 말을 발음나는대로 적어놓은 것일 뿐.
오직 순수한 기쁨

생각하고 분별하는 작용이 멈춘 경지에 도달했고, 더 깊이 주의를 집중하자, 투명하고 밝은 경지가 드러났습니다.
넘쳐나는 것이란, 생명의 자연적 발현이 아닌 것 모두
너희들은 이 모든 불타는 것과 그 원인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일체에 대해 싫어하는 생각을 가질 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불꽃이 꺼지고, 그때 근심과 슬픔과 번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게 된다. - 우루벨라의 산상수훈
눈에 화살이 박힌 형국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외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 그만큼 강렬하고 동시에 위험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를 향해 시시각각 무수히 날아와 꽂히는 색성향미촉법
저는 대개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해 하는 말이, 결국 그 사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칭찬하고 욕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무아가 네 자아란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너무 많은 자아가 있어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란 뜻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들 이미지들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생생한 접촉을 잃고, 다른 사람과의 의미있는 만남을 놓치고 맙니다. 이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 우리는 전혀 다른 매체로 도피합니다. 술과 도박이며 외도 뿐이 아닙니다. 책과 TV, 극장과 공연장, 미술관으로 가는 발걸음 속에서도 그 도피가 은밀히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창공을 나는 새의 아름다움을 보고, 또 무엇보다 사람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면, 우리는 연예나, 애완견에 그토록 몰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엄경은 본래 잡화경
저마다 저 나름대로 피고, 그 핀 자태와 향기가 모여 한바탕 축제를 이룬 잡화엄식이 이 세상의 풍경임을
간판 가운데 둘에 하나는 음식점이고, 내 놓은 음식들도 상다리가 휠 지경입니다.
잘못된 음식습관은 주로 심리적 요인에 기인한다는 것, 그것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다이어트와 건강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
몸이 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나는 마음을 비워주어야 합니다.
음식 맛을 느낄 수 있으면 도 또한 멀지 않습니다.
이름으로 상처받지 마십시오. 칭찬은 무엇이고, 비난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이해관계와 호오에 따른 또 다른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을... 칭찬과 비난은 자기 스스로에게 가해야 하는 것이지, 남의 입과 생각을 빌려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객관적 사태는, 있다해도, 우리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관자재보살이 이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일체의 고통과 재난으로부터 벗어나셨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실제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없이 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입니다.
오늘 지은 업이 마음의 창고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아닌 부처입니다.
신심명은 네 마음을 에누리없이 그대로 믿으라!는 눈물겨운 권고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믿지 않고, 오래된 책이나 자기 밖의 권위에 기대려는 오랜 습성을 키워왔습니다.
사리자야, 우리는 사물과 세계를 두고, 태어난다거나 사라진다고 말 할 수 없다. 그곳은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인간적 흔적을 덧붙일 수도 없고,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는 세속적 득실도 운위할 수 없다. 자아의 개입이 근원적으로 차단된 곳이기에, 거기 사람과 자연은 구분되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 또한 분리될 수 없고, 바라보는 시선과 거기 잡히는 풍경도 둘이 아니다. 어디 끄뿐인가. 인간에게는 원초적 무지가 있다는 것도 생뚱맞고,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권유도 쓸데없다. 늙고 죽음의 개념도 없으니, 그 늙고 죽음을 초월할 수도 없지 않은가. 생로병사가 도무지 없는 판에, 붓다가 초월과 해방의 방법으로 가르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또한 뜬금없는 소리이다. 기억하라. 요컨대 깨달음이란 것도 농담이니, 더구나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더더욱 황당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없고, 그리하여 얻는 것도 없으니...요컨대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믿읍시다. 작게는 작은 거슬림이 있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어도, 크게는 어떤 역경에 처하거나 불행에 처하더라도, 그 주어진 운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쓴 약은 깊이 울대로 삼키는 연습을 해나갑시다. 그 용기와 더불어 세상은 나의 자아와 대적하기를 줄여나갈 것이고, 그와 더불어 마음에는 장애물이 점점 더 사라질 것입니다. 마음에 장애물이 없을 때, 우리는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그 욕망의 저쪽 야누스인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때 세상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투명하고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보디스바하, 거기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경열반이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