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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de Botton - 행복의 건축 본문

책/600

Alain de Botton - 행복의 건축

사랑스런 터프걸 2010. 6. 3. 23:24
행복의 건축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알랭 드 보통 (이레,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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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상적인 조각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탁자와 기둥을 좋아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구상적인 작품을 존중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양쪽 어느 장르이든 인간과 동물의 속성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고 의미있는 것을 환기시켜줄 때 그 작품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형태로부터 여러가지 정보를 연역해내는데 익숙하며, 이런 습관 때문에 경쟁하는 건축style로부터 서로 다른 강렬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서로 얽혀있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 스탕달

우리 내부에 필요한 것 - 그러나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위험이 있는 것 - 을 표현해주는 물질적 형태들을 주위에 배치한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바람직한 모습을 바라보게 해 주고, 중요하면서도 쉬이 사라지는 측면들이 살아있도록 유지해 줄 방이 필요하다.

사실 하고싶은 말은 자기가 힘들다는 것 뿐인데. 천장은 남자의 진정한 고향이지만, 그곳으로 돌아갈 길을 찾을 수가 없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일 때 비서가 대기실로 들어오더니 그를 회의실로 안내한다.
자신의 일이 모두 정돈이 잘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로버트 애덤 홈 하우스의 천장 밑에서 살고 싶은 갈망을 느끼지는 - 심지어 그것을 보고 눈물까지 흘리지는 -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구매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갈망을 처리하는 가장 무미건조한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과 자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감정에 대한 가장 무딘 반응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자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 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보링거는 인간의 역사에서 예술에는 오직 두 가지 기본유형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추상적' 예술과 '사실적' 예술인데, 어떤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회에서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선호될 수도 있다.
보링거는 그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그 사회에 결여된 가치에 있다고 믿었다. 조화, 고요, 율동과 융합된 추상예술은 주로 차분함을 갈망하는 사회에서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내적, 외적 질서를 달성한 사회, 그래서 그 안의 삶이 예측 가능하고 또 지나치게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그와 대립되는 갈망이 생겨난다. 시민들은 일상과 예측 가능성의 숨막히는 손아귀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며, 심리적 갈등을 달래고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강렬한 느낌을 다시 확인하려고 사실적 예술로 돌아가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스타일을 선택했느냐 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이 아니라 결여하고 있는 것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역사가들은 18C말의 서구가 모든 주요한 예술 형식에서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자연스러운 것과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술에서 자연스러운 것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파리의 이 거리가 감동을 주는것은 그 특질이 보통 우리 삶을 채색하는 특질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은 그 반대되는 것들에 지나치게 익숙하여 마음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조명은 칙칙해질 것이고, 잡초들은 아무런 제어없이 우리 서재와 상점들 위로 암같은 촉수를 뻗을 것이다. 우리는 미리 한 쪽 구석에서 이런 불가피한 재앙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의 아름다움에 특히 민감하다. 그곳에서 우리의 생존의 핵심을 이루는 특질들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질서를 향한 충동은 삶을 향한 충동과 동의어임이 드러난다.

이 장원 저택은 새로운 인간적 이상을 제시한다. 여기에서는 사치가 퇴폐를, 인간의 민주주의적 진실들과 접촉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소박이 고상이나 세련과 종합될 수 있다.
이런 섬세하게 균형을 잡은 건물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이런 건물들을 보면서 우리 성격의 갈등하는 측면들 사이에서 우리가 판결을 내릴 수 있고, 우리 자신의 곤혹스러운 대립물에서 뭔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에서는 어떤 것도 그 자체로는 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엉뚱한 곳에 있거나 크기가 엉뚱할 뿐이다. 반면 아름다움은 부분들 사이의 일치된 관계의 산물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캐물으며 미로와 같은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우리가 이러저러하다고 단정하는 단순한 관점의 유혹에 넘어가버렸다.

나쁜 건축이란 결국 설계만큼이나 심리파악의 실패이기도 하다. 건축에서는 이런 경향이 물질로 표현되지만, 다른 영역으로 가면 엉뚱한 사람과 결혼을 한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일자리를 고른다거나, 재미없는 휴가계약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경향이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에 만족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곳들은 겸손과 끈기를 갖춘 드문 건축가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자신의 욕망에 관해 캐묻는다. 기쁨을 이해하면,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끈기를 갖고 논리적 설계도로 바꾸어 놓는다. 이런 겸손과 끈기가 결합되어 그들은 우리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요구까지 충족시키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저기, 동자꽃들 속에는 25번지의 주방이 자리를 잡을 것이며, 그곳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언젠가 부모와 말다툼을 할 것이다.

바스의 크레센트와 에든버러의 뉴타운 건설이 싸게 먹힌 것은 아니지만, 빠듯한 예산 때문에 건물이 추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난을 핑계로 영감부족을 감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당하다.

슈뢰더 하우스, 판스워스 하우스, 캘리포니아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 등은 자신의 규모나 건축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