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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글쓰기 본문
순박하고 수사가 없는 글이지만 우리가 좋은 글이라 인정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 글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글쓴이의 독창적인 생각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독창적인 사유력이란, 다른 말로 하면 고정관념을 부숴버리고 자기만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을 일컫습니다. 사회적으로 널리 통요오디고 있는 생각, 그러니까 통념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설혹 그것이 이단적이거나 불온하더라도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펼쳐낼 때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글이라 치켜세우지요. 박노자, 진중권, 강준만 같은 이들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경험해보아서 알겠지만, 말하다보면 전혀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가 솟아나기도 합니다. 나랑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다보면, 근거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고 미처 고려해보지 못한 사항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더욱이 이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생각의 뼈대가 세워집니다.
책이란 저 깊은 곳에 가득 차 있는 지하수와 같은 것이고, 쓰기란 그것을 끌어올리는 펌프와 같은 것입니다.
책을 읽으며 상상력과 표현력을 키워 나갑니다.
아름다움을 함께 느낀다는 건 그 어떤 사랑의 느낌보다도 더 짜릿한 교감일지 모릅니다.
A4용지 한 장 분량의 글은 대개 다섯 단락으로 이루어집니다. 서론 한 단락, 결론 한 단락, 그리고 본론 세 단락이 되지요. 이 때 본론 세 단락을 꾸미는 방법으로 3가지 키워드를 활용한다는 뜻입니다.
영화와 소설은 모두 이야기(story)의 예술입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엔 갈등의 골이 치명적으로 파여 있죠. 결국 이런 갈등이 봉합되고 치유되기에, 우린 안도와 화해라고 하는 마술같은 쾌감을 맛보게 돼요. 좋은 영화와 좋은 글은, 늘 갈등을 씹어먹고 자랍니다.
밋밋하게 자기 주장만 늘어놓지 않고, 대립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의견을 적절하게 대비, 대조, 병렬해나가는 것입니다.
좋은 글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주장을 속시원하게 터뜨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갈등은 성장을 불러옵니다. 평안한 사회보다 갈등하는 사회가 발전 가능성이 높고 더 민주적인 사회입니다.
세상에 어찌 나만 참된 것이나 진리를 거머쥘 수 있겠는가. 나와 다른 주장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 주장을 폐기처분할만큼 전면적인 진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아닐 터. 일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자기 주장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닐 터
또는 그 일리 때문에 내 본디 주장이 어떻게 바뀌어 새롭게 제기되었는지 보여주자. 네가 있기에 내가 있으니, 이제 우리는 타협과 조율, 그리고 합의에 더욱 가까워진다.
이 부분에서 자신과 다른 주장의 근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고, 그 가운데 수용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하면, 그만큼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문제해결이 지나치게 과대포장되어있다. 사실 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은 문제 창조다. 왜냐하면 스스로에게 정말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을 때 어느 누구의 답도 들어맞지 않는다면, 그건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도록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말을 조금 바꿨더랬습니다. 성찰적 에세이와 서평을 써보라고 말입니다. 오십보 백보인 것 같지만 사실 큰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일기라고 하면, 잡스러운 일마저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젖게 되지만, 성찰적 에세이라 하면 달라집니다. 겪은 일 가운데 스스로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한 경우만 쓰려하기 때문이지요.
독후감이라하면, 왠지 책 내용만 요약해 놓아도 되는 양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서평이라 하면 요약과 감상을 넘어 비판도 포함하고 있지요.
알고보면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하나씩 트루먼의 그것과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살죠. 난 절대로 1등이 될 수 없어. 난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 와 같은 두려움 말입니다. 내 안에 도사린 두령움에 정면으로 맞설 때만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사실을 트루먼쇼는 말해주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