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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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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의 외로움은 자신의 속내를 전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요.
솔직함과 정직함은 내가 만난 시인을 포함한 모든 인문정신의 핵심에 놓여있다.
영원회귀.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
Nietzsche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가 순간의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리는 없다. 순간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삶이 비겁하다면 우리는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10만년 주기로 비겁하리라는 슬픈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굴욕과 비겁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Lacan은 인간이 금지된 것만을 욕망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금지가 없다면 욕망도 생길 수 없다는 뜻이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과거 타자가 욕망했던 것, 혹은 금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평생 가면을 쓰고서는 살 수가 없다. 외롭기 때문이다. 자신의 맨 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불가피하게 쓰고있는 persona만을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고독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맨 얼굴이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persona를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낙타(맹목적으로 따름) - 사자(일체의 억압을 부정하는 자유정신) - 아이(솔직함과 당당함=창조)
이미 일어난 생각은 이어지지 않도록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대들이 10년 동안 행각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 임제어록
서양의 스피노자, 그리고 우리의 동학이 중요한 이유는 두 사유전통이 공통적으로 인간이 직면하는 난제를 초월자에게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인문정신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남편에 대해, 혹은 남편은 아내에 대해 부단히 자신을 새롭게 가꾸어야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낯섦, 혹은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자신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나 긴장감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의예지의 명칭은 반드시 우리의 실천 이후에 성립한다. 어린애가 우물에 들어가려할 때 측은지심이 생겨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仁이라 말할 수 없다. 밥 한그릇을 성내거나 발로 차면서 줄 때 수오지심이 생겨도 그것을 버리고 가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의라 말할 수 없다. 큰 손님이 문에 이르렀을 때 공경지심이 생겨도 맞이하여 절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예라 말할 수 없다. 선한 사람이 무고를 당했을 때 시비지심이 생겨도 분명하게 분별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가서 智라 말할 수 없다.
고통에 빠진 타인을 보았을 때 그와 비슷하게 고통을 느낀다면, 그 사람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정호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날개를 다친 새, 굶주린 고양이, 심지어 시들어가는 소나무를 보고서 고통을 느낀다면, 새, 고양이, 소나무는 바로 나의 것이다.
성인에게 있어 자신과 모든 타자는 하나의 몸으로 묶일 수 있다. 고통을 느끼는 범위만큼이 나의 것이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정호가 만물일체라고 묘사했던 경지이다.
삶이란 고통이자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통찰이다. 결코 희망찬 메세지는 아니다. 삶이 고통이라니 말이다.
섬세한 정신은 무의식의 층위에 머물던 미세지각들을 의식할 수 있게 된 정신을 말한다. 미세지각은 영원히 무의식의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집중적인 관심과 노력으로 미세지각을 의식할 수 있다.
육감Sixth sense은 5가지 감각이 종합되어 함께 작동하는 공통감각common sense을 의미한다.
육감이 발달했다는 것은 5가지 감각의 미묘한 변주에 민감하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과거에 발생한 결여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욕망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내부로부터 요동치는 마음을 부정하려고 했던 진정한 이유는 타자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타자의 고통이나 행복에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 것, 다시말해 어느 경우든 고요한 물과같은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은 자비를 꿈꾸던 불교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태일 것이다.
여성의 몸은 차이를 존중하는 반면, 가부장제 사회라는 거대한 몸은 차이를 배제하고 계급서열상으로 구성되어있다.
삶의 중요한 대목은 대부분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애매한 것 아닐까?
남성의 언어로 자신의 경혐을 표현하다보면, 여성은 언어의 부적절함을 통감하게된다.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수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진정으로 논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시인처럼 예리한 감수성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꾸라지는 드렁허리들을 동정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해서 드렁허리들로부터 보답을 받으려고 생각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미꾸라지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싶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했을 뿐이다.
소통과 공감은 동정심이나 혹은 일체의 보답의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간은 확신한다. 우리가 자연스러운 삶을 가장 즐겁게 영위할 때 소통과 공감은 기대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지속 가능한 소통과 공감의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삶과 자신의 내면을 더 치열하게 성찰해야 한다.
덕은 득이다.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능력, 마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