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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할 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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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되면 삼ㄹ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어렵다는 이 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이란 대수롭지 않으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와 어려움이 가혹하다고 불평을 하게된다.
신경증인 사람들은 성격장애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쉽게 치료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려움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고 자기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신경증(노이로제)환자는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굴고, 성격장애자는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모두 못살게 군다.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신경증보다 다루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문제의 근본원인을 볼 줄 모르고 자기 자신보다도 오히려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믿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격 장애자는 자신을 분석, 진단할 필요를 인식하지 못한다.
에리히 프롬은 나치즘과 권위주의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이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했다.
책임지는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 백만, 천만의 사람들이 하루하루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무기력함'은 자유에 대한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삶이나 문제에 대해 책임질 줄을 모른다. 그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사실 자기들의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은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오늘의 진실에 충실하려는 진행형의 과정이다.
세상을 알려면 우리는 세상을 잘 살펴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상을 살펴보고 있는 자신을 살펴야만 한다.
현명한 생활이란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자기를 성찰하는 생활이란 지극히 고통스러운 삶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피해가려고 한다. 그러나 진실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그 고통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점점 덜 고통스럽게 되고)점점 더 자기 성찰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부와 권세가 그런 사람에게는 정신적 성장을 위한 수단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목적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참된 목적이란 오직 정신적 성장이나 인간의 발전인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나 애착을 갖고있는 것들의 질적인 차이는 무시하고 모두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로 남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현명함과 우둔함, 선과악, 귀한 것과 천한 것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애착과 사랑의 느낌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 이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열쇠가 되는 게 바로 '의지'다.
나는 사랑에 대해 정의하기를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의지'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적이기보다는 의지적인 것이다.
참사랑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압도되는 그런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감있게 심사숙고한 끝에 내리는 결정이다.
자신의 감정 속에서 사랑한다는 느낌의 증거를 찾는 것은 쉽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행동 속에서 사랑의 증거를 찾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사랑이른 행동하는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은 선과 악처럼 객관적인 것이지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여러분은 내가 5번째 방법을 추천하리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첫째로, 6살난 아이는 말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항상 모든 것을 다 들어주게 되면 다른 일을 성취할 시간이 거의 없다. 둘째로, 참으로 듣는 데는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부모가 너무 지쳐서 다른 일을 못 할 수 있다. 끝으로 그것은 대단히 지루하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것은 5가지 방법 전부를 그떄그때 균형있게 맞추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아이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말할 필요도 있다.
둘째로 아이들은 자신이 귀중ㄷ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귀중한 것들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참으로 들어주는 일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낭만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노력이 필요치 않다. 그러므로 많은 부부들은 낭만에 기대고 낭만만 바랄 뿐 진정으로 사랑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는 힘든 일을 감내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노력한다면 막대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이 일상이 되면 배우자는 상대방의 말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때 흔히 다음과같이 외친다. "29해를 함께 살았지만 당신에게 그런 면이 있다니,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했군요." 비로소 부부의 결혼생활에 성장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인생에서 가장 깊이 절망하고 있던 바로 그 때 내 무의식 속에서 나의 목소리가 아닌 어떤 영적인 신의 계시 같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정한 안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생의 불안정을 맛보는 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고 모든 거룩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는 그제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절대로 이러한 거대한 뛰어넘기를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외양과는 상관없이 심리적으로는 아직도 그들의 부모의 아이로 남아 물려받은 가치에 따라살고, 부모의 승낙이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그들의 부모가 오래전에 사망하여 땅에 묻혀있는 경우에도), 감히 자신의 운명을 자기 손안에 쥐어보지 못한다.
온유한 것은 인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알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생긴 그대로 진실하게 보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으로 온유함에 틀림없다.
만약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참을성있고 사려깊게 그러나 활발하게 아이들이 진실에 직면할 수 있도록 비판해야한다. 또한 부모도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를 바로보게 하고 비판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결혼관계가 상대의 정신적 성장을 촉진시키는 기능을 하려면 서로가 지속적으로 바로 봐야한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최선의 비판자가 되어야 참으로 성공한 결혼이다.
아이가 사태를 바로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사실에 직면시키게 한다면, 그것은 시간낭비일 뿐만 아니라 더 나쁜 결과를 낳을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말을 잘 듣게 하고싶으면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해야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을 주려면 그 사람의 능력에 맞게 전달되도록 맞추어야 한다.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 더 겸손해진다. 이럴수록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거만하게 행동할까 봐 두려워한다.
얕은 시냇물은 시끄럽지만, 깊은 강물은 소리없이 흐른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감정을 잘 조절하고 평정을 잘 유지한다고 해서 그 사람은 정열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인간의 감정은 에너지의 원천이다. 감정은 우리가 삶의 과업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노예의 노동력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또 그가 사랑할 대상이 많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은 쉬운 게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신의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이 괴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택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선택에는 많은 요인들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첫째로 사랑을 받을 사람은 그 사랑으로 인해 정신적 성장을 이룰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갑옷으로 무장한 듯 마음의 문이 꽁꽁 닫혀 아무리 이쪽에서 노력해도 그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당신의 사랑으로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고 마른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와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데에도 능력의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만약 배우자와 아이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이룬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대개의 사람들이 일평생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완전히 이기적인 인간이다. 나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을 통해 성장함에 따라 내 기쁨도 증가하고, 계속해서 증대될 것이다.
그녀가 가진 목적은 최대한 성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할 것이며 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내 아내와 나는 결혼을 산을 오르기 위한 base camp에 비유했다.
성장하려고 할 때에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이런 질문은 어리석다. 그들은 무심히 이렇게 내뱉을 뿐, 그 질문의 답에 흥미도 없으며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때로 환자들이 나에게 언제 그들의 치료가 종결될 것이냐고 묻는데, 나는 "당신 자신이 좋은 치료자가 될 수 있을 때"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보통 사람으로 만족할 뿐 신처럼 사랑을 넓은 세상에 펼쳐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성장발달에 가장 기본이 되는 문화는 가족문화이고, 부모는 그 '문화의 지도자'인 것이다. 더욱이 가족문화의 영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말해 준 신과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세계다. 즉, 그들이 서로에게 또는 가족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자라면서 세계의 본질에대해 배우게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작은 우주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인간존재와 사회, 세계의 본질에 관한 소련인과 미국인들의 기본적인 가정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가정들이 양측의 협상태도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측 모두 상대방이 다른 가정 위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자기측의 가정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련과 미국, 양측 모두 상대방의 협상하는 태도를 미치광이 짓이라고 보거나 고의로 악랄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속담에 나오는 세 명의 장님과 같다.
그런데 교회는 의사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지 않는다. "우리와 함께 이러한 놀라운 현상들을 연구해 보시겠습니까?" 의사들도 신앙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우리가 잠들어있을 때는 물론이고 깨어있을 때에도 대단히 유효적절한 정보를 제공한다. 물론 방식은 약간 다르겠지만, '자유연상' 또는 얼핏 스쳐가는 생각의 형태로 나타난다. 꿈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개의 경우 이러한 엉뚱한 생각이 지니는 중요성을 놓칠 때가 많다.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행동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을 싫어한다. -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시말해 말과 행동에서의 실수 또는 프로이트가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에서 무의식의 소산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 '프로이트 적 실수'등이 바로 그것이다.
실수는 모든 억압된 감정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 믿고 있는 것보다는 좀 낫거나 못하다. 그러나 우리의 무의식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있다. 정신적인 발달과정에서 핵심적이고 주된 과제는 자기가 의식하고있는 자기의 개념을 실제의 그것과 일치시켜가는 일이다. 이 평생의 과업이 심리치료를 통해 효과적으로 비교적 빨리 성취되어갈 때 사람들은 종종 '새로 태어난' 느낌을 받는다.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이제 나는 완전히 새롭고 다른 사람이다."
사실 무의식은 모든 면에서 의식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현명하다.
웹스터 사전에는 초능력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귀중한 것을 뜻밖에 찾아내는 재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율법 뒤에 숨어있는 이유를 묻지 못한 진정한 까닭은 게으름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 무서운 하느님과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 말이다. 그러나 모든 두려움이 다 게으름은 아니지만 두려움 가운데 상당 부분이 게으름으로 인한 것이다. 즉,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따른 두려움,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밝음을 훼손한다.
악한 사람들이 빛을 싫어하는 이유는 빛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빛과 선량함과 사랑을 파괴한다.
정말 악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열어보이는 것이 귀찮아 회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닫고 지낸다. 그들은 자신의 게으름을 유지하고 병든 자아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능력이 닿는 한 모든 행동을 한다. 이 목적을 위해 행동하다보면 그들은 남을 파괴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 성장이 주는 고통을 회피하는 데 필요하다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지금의 자기 자신보다 좀 더 현명해지고 싶다면 자신의 내부에서 길을 찾아라.
이 길을 따라 열심히 가다보면 지식의 편린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점차적으로 사물이 의미심장해진다. 막다른 골목과 실망스러운 순간과 폐기해야 할 관념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점차 우리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고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하는 일이 실제로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도 자각할 수 있게된다. 우리는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상황의 본질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 때의 동기, 결과 및 연원 등에 관하여 완전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에게만 기대할 수 있었던 수준의 깨달음을 직접 얻게된다.
이런 단계의 영적 성장과 위대한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언제나 즐겁고 겸손하다. 그들의 깨달음 중 하나가 그들의 비범한 지혜는 무의식에 그 기원을 두고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총을 선택함과 동시에 은총에 의해 선택된다고 하는 역설은 초능력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이다. 이러한 초능력은 '가치 있거나 호감이 가는 일이나 사물을 일부러 애쓰지 않고도 찾아내는 재능'이라 정의될 수 있다.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과 행동에서의 독립심을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