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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100

사물의 철학

사랑스런 터프걸 2016. 5. 13. 11:03
사물의 철학
국내도서
저자 : 함돈균
출판 : 세종서적 201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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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둣주걱은 급해도 신발을 꺾어신지 않는 여유, 즉 외부정황을 주관적으로 제어하는 자기 통제력과 관련되는 사물이다.

스타일은 폼이고, 폼은 정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은 폼이라는 형식의 옷을 입고서만 나타난다고 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의 고유한 폼을 잃지말자.

군자는 주위를 살펴 환경과 창조적 협력관계를 만들면서도, 자기중심을 보존하고 소신을 유지한다.(和而不同) 반면 소인은 주위와 제대로 된 창조적 협력도 못하면서, 오히려 주위에 동화된다. 결국 소인은 주위에 흡수되어, 소신도 자기중심도 잃어버린다. (同而不和)


아이는 삶의 관성을 무너뜨리는 창조적 일탈과 자기긍정, 노예도덕으로부터 해방된 주체적 인간형이다. - 니체


반복되는 일상의 변화는 무수한 소리들 가운데 또 하나의 소리를 더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다른 주파수를 도입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남(타자)'이다.


시선의 비대칭 자체가 권력이다. - 푸코


온몸의 무게를 1cm도 안 되는 칼날 위에 모아 그 힘으로 치고나가는 스피드스케이팅이나, 균형감있는 공중점프가 필수적인 피겨스케이팅의 원리에는 공통된 게 있다. 온 몸의 중심을 한 곳으로 모으는 극대화된 집중력이다. 지성의 기술이라 할 학문이나, 정신적·종교적 차원의 명상원리, 감각을 극대화하는 기술이라 할 예술의 원리가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사치품, 예술, 도박 등도 물적 탕진의 형식을 구현하는 문명의 필수기제다.


신성을 꽃피우려는 자각과 노력이 없으면 인간은 신이 아니라 반대로 짐승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 니체


사람살이에서도 '정교한 계산능력'으로 늘 자를 들고다니는 이들이 있다. 오늘날 사회에서 소위 '잘산다'고 일컬어지는 이들 중 상당수는 이 '재는' 능력이 발달했으며, 그것은 사회제도 속의 합리화프로그램의 일종이기도 하다.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인간의 도덕행위를 심성론의 차원에서 소위 '마음'의 문제로 이해했지만, 사실 도덕행위를 보다 실천의 차원에서 보자면 '실천에 관련된 지적 판단능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칸트 도덕론의 이름도 '설천이성비판'이다.) 그것은 삶의 구체성에 대한 성실한 파악이고, 통찰력이 개입된 배려의 능력이기도 하다.


자동문이 암시하는 사고의 자동화 경향은 우리에게서 '경험'을 빼앗아간다. - 아도르노


각성覺醒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깨어나라는 뜻이다. 종교적, 성찰적 의미에서 사회의 일상성은 오히려 술에 취한 상태, '미망迷妄'의 상태다. '지금 이 시간에 깨어 있어라'고 외쳤던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이라 불리는 당대적 일상성과 제도적 삶을 각성의 대상으로 여겼다.


어른과 도덕적 의무와 문자적 지식을 경멸하고, 대신 아이와 소녀들 춤과 음악을 사랑했던 니체


우리말로 간단해보이는 '어질 인'을 공자는 '사람다움'이라고 사유했다. 이 '사람다움'은 단독자로서의 개인의 내면성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글자 모양을 보면 '사람 둘이 있는 게 仁이라는 글자다. 공자는 사람다움을 최소한 이 두 사람이 있을 때 갖추어야 할 덕목이며, 원리적으로는 그 둘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덕성으로 이해했다. 둘 이상의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덕성이라면, 이것은 마음의 문제라기보다 '윤리'의 문제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사람다움에 관한 공자의 철학은 심성론이 아닌 윤리학 또는 도덕철학이며, 실천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기하학 geometry의 정리

이 기하학을 학문 정신의 바탕으로 삼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는 justice와 윤리와 미학과 형이상학이 모두 교육되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


학문은 기본적으로 눈 앞의 현실에 매몰되거나 붙잡혀있지 않으므로 대상과 현실에 대한 거리감각을 훈련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자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이 학교를 두려워하며, 젊은이들이 학교에 매료되는 까닭이 이 여유의 정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여유의 정신에서 비롯되는 삶에 대한 거리감각은 자동화 된 사고를 저지하고 성찰하고 반성하고 비판하는 사유를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그가 그 벽에 쓴 것은 단순한 글씨가 아니었다. 그것은 눈앞의 실용성에만 결박된 우리 생각의 표층성, 힘이 센 상투적 사고의 벽을 무너뜨리고 개방하려는 혼신의 전투였다. 진짜 칠판은 벽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은 벽을 무너뜨리려고 만든 사물이다.

칠판에는 일상적 실용성에 묶이지 않는 여유의 정신을 새긴다.


보들레르는 예술가는 인공낙원에서 안식을 찾는 자라고 말했다. 니체는 낙원의 거주자는 신이 아니라 주인도덕을 지닌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사람을 노예근성과 제 안의 짐승성을 극복하려는 인공적 노력의 산물로 여겼다. 

거룩한 정신은 신의 본성이 아니라 넘어서려는 인간의 인공적 정신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