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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핑크 - 조선왕조실톡 본문

책/900

무적핑크 - 조선왕조실톡

사랑스런 터프걸 2016. 8. 19. 11:18
조선왕조실톡 1
국내도서
저자 : 변지민
출판 : 이마(YIMA)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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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패밀리의 탄생
건국fam
태조 1392~1398
정종 1398~1400
태종 1400~1418


아버지 이자춘을 따라 고려에 귀화했을 때
이성계는 21세
황산대첩의 영웅


1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을 중심으로,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왕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자신의 반대파와 두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왕자들을 모두 제거한 일이었다.


이성계는 본부인만 두 사람인 특이한 케이스였다.
조선을 건국할 때 신덕왕후 강씨가 정치적으로 많은 보필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방원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대활약에 비하면 뭘 했는지 알 수가 없을만큼 미미하다. 게다가 나라가 갓 들어선 혼란기에 자기 소생을 세자로 밀어붙인 무리한 행동 역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종
21세부터 아버지를 보좌하며 왜구와 싸웠다.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실력이 없으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터에 데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첫째아들 이방우는 아버지덕에 과거시험을 뒷문으로 패스한 이후로 평범하게 벼슬을 했고, 다섯째 아들 이방원도 도성에서 관직생활을


정종의 아내 정안왕후 김씨에게서 자식이 없기 때문도 있었다.


이성계의 넷째아들 이방간은 동생 이방원을 밀어내고 자기가 한 몫 잡아보겠다며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역량 차이가 빤히 보여


성군fam
세종 1418~1450
문종 1450~1452
단종 1452~1455


그러나 그 말대로 살기에 충녕대군의 야심은 너무 컸다.
그 능력을 고스란히 썩히기에는 본인도 아까웠을 것이다.
양녕대군은 손 놓았던 책을 다시 잡아보기도 했다.
상대는 역대급 먼치킨. 어찌 일반인이 따라갈 수 있었겠는가.


밀덕 문종


폭군fam
세조 1455~1468
예종 1468~1469
성종 1469~1494
연산군 1494~1506


아버지 세종이 장장 20년 넘게 가꿔 온 인재의 밭을 결딴내며 얻은 왕위란 세조에게 어떤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건국 초기의 혼란기를 거쳐 평화로운 안정기에 들어선 세종과 문종 치세 이후 벌어진 쿠데타였기에 이는 말 그대로 '뜬금포'였다.
지나친 칭찬은 우스꽝스러워지듯 세조실록에 묘사된 세조는 아무리 봐도 허세로 가득한 인물이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고작 1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먼저 간 형과 같은 나이인 스무살 때였다.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은 성군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결과적으로 그것이 성종의 명줄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아버지가 들들 볶이면서도 입 뻥긋 못하는 걸 보며 자란 연산군이 왕 위에 오르게 된다.


잔인한 폭군이 실은 어린시절의 상처를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고 있다?
노비였던 유모의 신분을 양인으로
그는 친엄마의 죽음을 이용해서 신하들의 목을 쳐대는 폭군이었다.
예술가
장녹수


조선왕조실톡 2
국내도서
저자 : 변지민
출판 : 이마(YIMA)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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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패밀리의 활극
사화fam
중종 1506~1544
인종 1544~1545
명종 1545~1567


치마바위의 전설은 진실 아님
중종에게 옛 부인을 다시 보고 싶은 의지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 신씨의 복위를 막는 가장 큰 이유



겉으로는 물렁해보이지만 자존심이 세서 잘 토라지고, 나쁜 일은 남에게 미루면서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 피해자라 외치는 무책임한 사람.
임금도 신하도 나라나 미래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해졌고, 그래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매우 꽃돌이였다고. 스스로는 "이게 어찌 사내의 얼굴인가"라며 싫어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안로를 축출한 주체는 누구도 아닌 중종 본인
한때 김안로에게 온갖 총애를 내렸던 중종은 그렇게 순식간에 김안로를 죽이고 말았다. 이전의 누군가에게도 그랬듯이.


이게 다 문정왕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그럴리가 있겠는가. 앞서 말했다시피 조선에는 관리와 기구가 있어 왕 혼자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문정왕후가 전권을 휘두를수도 없었다.


왜란fam
선조 1567~1608
광해군 1608~1623


유성룡은 스트레스가 쌓여 "이이는 정말 똑똑하지만 말이 너무 심합니다!"라며 선조에게 이이의 험담을 하기도
이이의 문집이나 실록에는 10만 양병설이 직접적으로 언급된 적이 없으며 그가 죽은 다음에야 서인들이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용인에서 조선과 왜가 맞부딪힌 싸움.
당시 조선군의 군세는 8~10만
반면 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600명 남짓


왜 일본군은 전라도에 가지 못했을까?
이순신, 의령-곽재우, 이치, 금산, 권율, 항왜, spy한음 이덕형, 밀덕 유성룡과 명나라 낙상지


역모의 심문이나 궁궐건설, 인목대비 폐위와 같은 개인의 권력과 원한에 얽힌 문제에만 지나치게 열성적이었다.
광해군은 인조보다 외교적인 측면에서 뛰어났을수도 있다. 하지만 외교적 재능이 조금 뛰어나다해도 내치, 곧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잘 해내지 못했다면 임금으로서는 저평가받을 수 밖에 없다.
명나라는 내내 큰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정식으로 인준해주지 않았다.
훗날 광해군이 망해가는 명나라에게 굳이 의리를 지키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톡 3
국내도서
저자 : 변지민
출판 : 이마(YIMA) 201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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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백성실톡


조선왕조실톡 4
국내도서
저자 : 변지민
출판 : 이마(YIMA) 201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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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뿔뿔이 흩어진 조선 패밀리
인조 1623~1649

소현세자 1612~1645
효종 1649~1659


조선시대 최악의 임금은 누구일까? 누군가는 선조를, 누군가는 고종을 들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단언컨대 인조를 꼽겠다.


역관은 일반적으로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이었으며 엄격한 수련코스를 거쳐야했다. 역관 집안의 아이들은 5살쯤부터 외국어를 배우고 열흘마다 한번씩 시험을 치렀다. 특히 우어청이란 곳에 들어가면 하루종일 외국어로만 말하도록 했으니 요즘의 외국어교육 저리가라 할만큼 열성이었다.
이렇게 공부를 하고나면 역과시험을 통과해야만 역관이 될 수 있었고, 한 번 붙은 뒤로도 계속 시험을 치러야했다.
역관은 대단히 귀중한 인재였고 중인이라는 신분임에도 막강한 권한과 부를 소유할 수 있었다.


청나라는 꾸준히 인종게 그를 대신해서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우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의 인조와 심양의 소현세자를 경쟁시키고 서로 견제하게 했다. 물론 이 수작에 홀랑 넘어간 인조가 똑똑한 사람이 못 되는 것은 사실


조선왕조실톡 5
국내도서
저자 : 변지민
출판 : 이마(YIMA) 2016.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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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명의 왕비
현종
숙종


조선왕조실톡 6
국내도서
저자 : 변지민
출판 : 이마(YIMA) 2017.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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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두번째 영광
경종
영조
정조


조선왕조실톡 7
국내도서
저자 : 변지민
출판 : 이마(YIMA) 2017.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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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조선 패밀리
우왕좌왕fam
순종
헌종
철종


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