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भगवद्गीता바가바드 기타(신의 노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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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는 700구의 시로 된 짧지만 유용한 힌두교 경전이다. 마하바라타 제 6권의 일부로 보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전쟁의 역사적 배경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고 한다.
힌두 경전은 신이 직접 계시해 준 슈루티와, 신의 화신이나 예언자, 성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스므리티로 나뉜다. 바가바드 기타는 스므리티지만 슈루티로 볼 수도 있다.
사촌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에게 아르주나가 묻는다. "도대체 삶이 뭐길래 이런 전쟁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대화를 장님인 왕에게 천리안을 가진 신하가 보고한다.
내가 앙코르 왓에서 라마야나 벽화를 봤었다. 라마의 영웅적인 행적이 묘사된 대서사시라고 한다. 라마는 비슈누의 7번째 화신이고, 크리슈나는 그 뒤를 이은 8번째 화신이다. 라마는 악마 라바나를 죽였다. 힌두 신화에 따르면 크리슈나도 악의 무리들과 오랫동안 싸웠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투쟁에 대한 기록이며 가르침이다. 그냥 나오니까 반가워서 ㅋ
(비슈누의 모습: 네 개의 팔에 진리의 방망이, 원반, 소라고둥, 연꽃을 들고 있고 머리에 왕관을 썼다.)
어찌할 수 없는 시공간에 얽매인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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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주나가 싸워야 할 상대는 육체적인 친족과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다. 세속에 끌려다니는 저급한 자아와 자신의 영적인 약점이 싸워 이겨야 할 적이다. 긍정적인 에너지와 부정적인 에너지는 우리 속에서 함께 자라고 있기에 남이 아니라 친족인 것이다.
참자아는 영원하다는 궁극적인 전제부터 선포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슈랏다(인생관) - 믿음이라기보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 어떤 사람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구나(기운) - 삿트바는 밝고 고요하고 순수한 기운이고, 라자스는 활동적이고 격정적인 기운이며 타마스는 어둡고 무거운 기운이다. 그런 것은 영원한 본질이 아니다. 모든 행위는 구나들의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구나들의 활동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단지 상태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물질에서 삿트바 기운이 지배적이면 햇빛이나 공기 같은 기체성 물질이 되고, 라자스 기운이 지배적이면 물과 같은 액체성 물질이 되며, 타마스 기운이 지배적이면 돌이나 바위같은 고체성 물질이 된다.
마음에서 삿트바 기운이 지배적이면 침착, 정결, 평온 등의 특성이 나타나고, 라자스 기운이 지배적이면 열정, 불안정, 도전적인 활동 등의 특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타마스 기운이 지배적이면 우둔함, 게으름, 잠과 같은 특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아무리 고상한 차원의 행위라고 할지라도 마지막에는 그것마저도 넘어서야 한다. 프라크리티(행위의 세계)를 넘어서 푸루샤(영원한 신적인 정신)의 차원에 도달하기 전에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가 없다.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목표가 분명하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에 도달하기 어렵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노력한 만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수도 있다. 모든 고통과 슬픔은 실재가 아닌 것을 실재로 착각하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고통과 슬픔과 죄악은, 주인인 영혼이 물질의 세 기운인 구나들의 활동에 얽매여 종노릇을 할 때 생긴다. 하지만 참자아 주인공은 구나들의 활동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현상세계의 구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에 이른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대답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이성 자체가 프라크리티의 변화과정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트라(진언) - 옴, 타트(그것), 사드(실재, 선)
산냐시는 가정과 사회를 버린 수행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크리슈나는 이런 종류의 포기를 권하지 않는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런 종류의 포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크리슈나가 권하는 포기는 탸가(초연함)이다. 탸가는 의무와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행위를 하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마야(환영)의 바퀴란 다름아닌 시간의 바퀴다.
브라흐만(신성)은 생명이 있는 존재이든 없는 존재이든 모든 존재속에 현존하고 있는 보편적인 실재이다. 이렇게 각 개체속에 현존하는 브라흐만을 아트만(참자아)이라고 한다. 아트만과 브라흐만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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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
본성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감각기관은 어떤 대상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감각기관에 남겨놓고 그대는 그 좋고 싫은 느낌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라.
이원적인 분별심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본성에 거슬러 억지로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보다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다 죽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죽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 공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의 일은 팽개치고 남이 하는 일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흉내 내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늘 억압을 받으며 위험한 지경에 빠지고 만다.
이기적인 욕망은 감각기관과 마음과 지성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참다운 지혜를 덮어 어둡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상에 빠진다.
그러므로 아르주나여, 그대는 그대의 감각기관을 제어함으로써, 지혜와 분별력을 어둡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대의 적을 쳐부수라.
힘을 다해 싸워라.
내가 곧 자기 자신의 참 자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육체를 자기로 여기는 그릇된 믿음을 부순다.
그리하여 육체를 자기로 여기는 에고 의식에 사로잡힌 존재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나와 하나가 된다.
아르주나여, 많은 사람이 나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써 집착과 두려움과 분노에서 벗어났으며, 참 자아에 대한 깨달음의 불길 속에서 정화되어 나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나와 하나가 되었다.
깨달은 사람은 행위 가운데서 행위하지 않음을 보고 행위하지 않음 가운데서 행위를 본다.
그들의 의식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며, 그들은 무슨 일이든 완전한 각성 상태에서 한다.
신들에게 곡식을 제물로 바치는 수행자가 있는가 하면 이타적인 봉사를 브라흐만의 불에 제물로 바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감각의 즐거움을 포기함으로써 감각기관을 제물로 바친다.
감각기관을 억제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느낌을 신의 행위로 여기는 수행을 제물로 드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감각과 생명에너지의 활동을 조절하는 수행을 제물로 바친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그 결과 영혼의 양식을 얻고 영원한 브라흐만의 경지에 도달한다.
아르주나여,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늘 불평하며 짜증을 낸다. 하물며 어떻게 다음 세상의 즐거움을 바라겠는가?
깨달음을 얻은 스승에게 다가가 그의 발 아래 그대를 맡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삶의 진리를 물어라.
그러면 그가 진리의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그대는 더 이상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이 참 자아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르주나여,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일지라도 영적인 지혜의 배를 타고 죄악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장작을 재로 만들듯이, 지혜의 불은 행위로 인해 쌓인 모든 카르마를 재로 만든다.
영적인 지혜의 불 만큼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요가의 길을 가면서, 영적인 지혜의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사람은 참 자아에 이르는 길이 자기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완전함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런 진리를 깨닫고 의식이 참 자아와 하나된 사람은 무엇을 하든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고, 듣고, 먹고, 마시고, 만지고, 냄새 맡고, 움직이면서도, 또 잠자고, 숨쉬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감각기관이 대상을 만나 반응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집착을 포기하고 브라흐만에 귀의하는 사람은 연꽃 잎이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악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들도 몸과 마음과 감각기관의 활동을 통해 행위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기적인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자아의 정화를 위함이다.
행위의 요가로 마음을 제어한 사람은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궁극의 평화를 얻는다.
하지만 마음이 제어되지 않은 사람은 행위의 결과에 집착함으로써 자기가 하는 행동에 얽매인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사람은 ‘아홉 개의 문이 있는 도시’인 육체 안에서 평안하게 거한다.
그는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종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육체를 움직이는 주인이다.
그는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지도 않는다.
참 자아 주인공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충동이나, 행위나, 행위와 결과의 연결은 참 자아 주인공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자연적인 본성의 법칙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만물의 주인 참 자아 주인공은 어떤 사람의 선행이나 악행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누구의 행위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어떤 행위와도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자기가 행위의 주체로서 선이나 악을 행하고 그 결과로 이런저런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믿으며 미혹의 늪에서 헤매는 이유는 참 지혜가 무지의 장막으로 덮여있기 때문이다.
무지의 장막은 자기 내면에 거하는 참 자아를 깨달을 때 사라진다.
태양처럼 빛나는 이 깨달음의 빛이 비치면 자신의 지고한 신성인 브라흐만이 밝게 드러난다.
참 자아 주인공을 깨달은 사람은 만물을 평등하게 본다.
그는 지식과 예절을 다 갖춘 종교 지도자나 천한 사람이나 코끼리나 소나 개를 볼 때 겉모양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참 자아를 본다.
이렇게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사람은 이 생에서 더 이룰 것이 없다.
그의 마음이 이미 완전하고 흠이 없는 브라흐만 안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모든 망상에서 벗어난다.
좋은 것을 얻어도 기뻐하지 않고 나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마음이 참 자아인 브라흐만 안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흐만에 안주하는 사람은 감각의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참 자아를 깨닫는 깨달음의 기쁨만을 추구하며, 의식을 브라흐만과 통합시키는 요가명상을 통해 불멸의 기쁨을 누린다.
아르주나여, 외적인 대상과의 접촉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은 시작과 끝이 있다.
그렇게 한계가 있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괴로움의 원천이다.
현명한 사람은 그런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육체에서 비롯되는 욕망과 분노의 충동을 극복하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이며 완전한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내면에서 즐거움과 평안한 쉼과 깨달음의 빛을 발견하며, 브라흐만과 하나되어 브라흐만 안에서 영원한 평화에 이른다.
지혜로 모든 의심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에게 죄와 허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 마음을 제어하여 참 자아에 안주하며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브라흐만 안에서 영원한 평화에 이른다.
지혜로운 사람은 참 자아를 깨닫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
그들은 외계와의 접촉을 끊고, 눈을 감고,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고르게 하며, 두 눈썹 사이에 있는 영적인 의식센터에 집중하는 명상을 통해 감각과 마음과 지성의 활동을 제어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기적인 욕망과 두려움과 분노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에 이른다.
이것이 해탈이다.
해탈한 사람은 나를 만물의 친구로, 우주의 주로, 모든 제사와 영적인 수행의 목적으로 알며 영원한 평화를 얻는다.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행하는 행위의 요가는, 영적인 깨달음이라고 하는 산의 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구도자가 가야 할 길이다.
요가의 길에 들어서서 수행에 몰두하는 사람은 참 자아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마음의 고요함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에 대해 집착하는 동안에는 마음이 고요할 수 없다.
그래서 행위의 결과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과 감각대상과의 접촉을 통한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면 우주적인 의식과 통합되는 진정한 요가의 경지에 오른다.
마음이 그대의 유일한 친구이자 적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그대가 곧 참 자아라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그대를 죄와 허물이 많은 존재로 깎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에고 의식을 극복한 사람에게는 마음이 자신의 친구이나, 자기 내면에서 참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마음이 그를 괴롭히는 적이다.
아르주나여, 다른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을 자신의 기쁨이나 슬픔처럼 여기는 사람은 가장 높은 단계의 요가를 성취한 사람이다.
그렇다. 마음을 제어하기란 바람을 잠재우는 것처럼 어렵다.
하지만 아르주나여, 그것은 가능하다.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수행과 집착을 버림으로써 마음을 제어할 수 있다.
에고의 의지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요가의 길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에고의 의지를 제어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꾸준히 수행하는 사람은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수천 명 중에서 한 명 정도가 영혼의 완성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아주 몇몇 사람만이 목표에 도달하여 나를 깨닫는다.
흙, 물, 불, 바람, 공간, 마음, 지성, 에고 의식 이 8가지는 모두 나의 본성적인 에너지가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 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차원의 내적인 본성이 있으며, 그것이 이 우주와 만물을 지탱하는 생명의 힘이다.
물질차원의 세 기운인 밝은 기운, 활동적인 기운, 어두운 기운도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나에게서 온 것이다.
이 세가지 기운의 상호 연관으로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현상에 미혹되어 그 배후에 있는 영원불멸자인 나를 보지 못한다.
세가지 기운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라는 환영을 꿰뚫기는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나에게 귀의하는 사람은 환영의 바다를 무사히 건널 수 있다.
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환영에 현혹되어 악한 일만 행한다.
나를 믿는 마음은 조금도 없이, 분별력을 잃고, 낮은 차원의 본능적인 충동만을 따르며 멸망의 길을 간다.
죽는 순간까지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에게 올 것이다.
이 점을 의심하지 말고 믿기 바란다.
죽음의 순간에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이 그의 다음 생을 결정한다.
죽는 사람은 마지막에 품고 있던 생각에 상응하는 존재의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나를 생각하며 그대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라.
힘을 다해 마음과 생각을 나에게 기울이면 반드시 나의 상태에 이를 것이다.
규칙적인 명상을 통해 얻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는 힘으로 나만을 생각하라.
그러면 지고한 신적인 차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아르주나여,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행자가 갈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환생에 이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자유에 이른다.
이제 그 두 길에 대해 말해주겠다.
아르주나여, 내가 모든 자연법칙을 주관한다.
자연법칙은 나의 감독 아래서 생물과 무생물을 산출해 낸다.
세상은 이렇게 나의 법칙 안에서 움직인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왔을 때 나의 외적인 모습 배후에 있는 진정한 모습, 곧 만물의 주인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보이는 현상에 미혹된 사람들의 지식은 공허하다. 그들의 삶은 온통 악과 재앙뿐이다. 그들은 헛된 것을 추구하며 그들이 하는 일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될 뿐이다.
나는 삶의 목표이다.
나는 만물의 부양자이며 주이다.
나는 내면에서 지켜보는 자이다.
나는 만물의 거주처이며 피난처이다.
나는 만물의 참된 친구이다.
나는 만물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다.
나는 만물이 태어나는 자궁이며, 만물의 영원한 씨앗이다.
나는 오로지 한 생각으로 나만 섬기고,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 몰두하는 사람에게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줄 것이다.
나뭇잎 한 장, 꽃 한 송이, 과일 한 조각, 물 한 그릇을 바치더라도 마음을 다하여 바치면 나는 그것을 아주 기쁘게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르주나여, 그대의 모든 행위가 나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도록 하라.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바치든지 무엇을 베풀든지 또는 무슨 수행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하고 하라.
그러면 그대는 행위의 결과(카르마)에서 벗어나리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선악의 업보에서 벗어나리라.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완전한 포기를 통해 완전한 자유를 얻고 나에게 오게 되리라.
아르주나여,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어떤 신분으로 태어났더라도 나에게 귀의하는 사람은 이생에서 가장 높은 목표에 이를 것이다.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가장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이 목표에 도달 할 수 있다.
하물며 덕 있는 왕족과 경건한 현자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왕 덧없고 불행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태어난 마당에 나만 생각하고 나에게 헌신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는가?
아르주나여, 그대의 마음을 나로 채우라.
항상 나를 사랑하고 섬겨라.
가슴으로 나를 찾으라.
그러면 그대는 나에게 오게 되리라.
나는 만물을 파괴하는 시간이다.
나는 세상을 집어삼키는 자이다.
그대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의 모든 전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멸절할 것이다.
그러니 아르주나여, 일어나 싸우라.
적군을 물리치고 옛 왕국의 영광을 되찾으라.
적군의 전사들은 이미 내가 죽였다.
이 싸움에서 그대는 단지 나의 손에 들린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비스마, 드로나, 자야드라타, 카르나, 그리고 다른 모든 적군의 전사들은 이미 나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대는 나가서 이미 내가 죽인 그들을 죽이도록 하라.
주저하지 말고 나가 싸워라.
승리는 이미 그대의 것이다.
그대가 본 것과 같은 형상을 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신들조차도 그대가 본 것과 같은 나의 모습을 보기를 갈망하고 있다.
경전 탐구를 통해서도 고행과 금욕과 자선행위를 통해서도 그리고 제사나 종교의식을 통해서도 그대가 본 것과 같은 나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아르주나여, 흔들리지 않는 헌신을 통해서만 나와 하나 될 수 있고, 나를 알고 모두를 볼 수 있다.
나를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사람, 그리고 이원적인 대립을 벗어나 누구에게도 적대감을 갖지 않는 사람은 나의 존재 속으로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된다.
기계적인 훈련보다는 지혜의 탐구가 낫고, 지혜의 탐구보다는 명상에 몰입하는 것이 나으며, 명상에 몰입하는 것보다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포기가 훨씬 낫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 하는 자는 즉시 평화를 얻는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며, 세상 또한 이런 사람을 흔들지 못한다.
기쁨, 경쟁심, 두려움과 열망에서 멀리 벗어난 사람, 이런 사람은 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하는 순수한 사람을 사랑한다.
일에 얽매이지 않고 욕망에서 벗어나 행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이런 사람이 나에게 헌신하는 자이며 나는 이런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원수와 친구를 평등히 여기고, 존경과 멸시를 하나로 보며, 추위와 더위, 즐거움과 괴로움을 동일하게 여기는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비난에도 화내지 않고 칭찬해도 우쭐거리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침묵할 줄 알고,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거주처에 대한 집착이 없이 어느 곳에서나 조화를 잘 이루는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만을 바라보는 이런 사람을 사랑한다.
아르주나여, 이 육체를 ‘밭’이라고 하고 밭을 알고 경작하는 존재를 ‘밭을 아는 자’라고 한다.
아르주나여, 내가 곧 밭을 아는 자이다.
나는 밭과 밭을 아는 자를 동시에 아는 것을 참다운 지혜로 여긴다.
밭의 구성요소와 그 변화를 아는 사람은 오만과 거짓에서 벗어난다.
비폭력, 용서, 정직, 순수, 스승에 대한 헌신 등이 그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잘 제어하고 감각대상과 에고의 욕망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생로병사와 고통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밭의 구성요소와 그 변화를 아는 사람은 소유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아내나 자식들에 대해서도 애착을 갖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행운이나 불행을 평등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한결 같은 마음으로 나에게 헌신하며, 세상 사람들과 무리 지어 어울리기보다는 한적한 곳에서 홀로 있으면서 오직 나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언제 어디서나 앎의 궁극목표인 ‘나(참 자아)’를 찾는 것이 참다운 지혜이다.
‘나’아닌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은 무지이다.
이제 그대에게 불멸에 이르는 지혜, 존재도 아니고 비 존재도 아닌 ‘그것’ 곧 시작이 없는 브라흐만에 대해 말해주리라.
그는 모든 존재의 가슴속에 머물고 있다.
그는 모든 빛의 원천이다.
그는 어둠을 초월해 있다.
그는 모든 앎의 대상이자 목표이며, 앎 그 자체이다.
삿트바는 밝고 순수하며 평화로운 기운이다.
그러나 삿트바에서 비롯되는 행복과 지혜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소유주인 참 자아가 속박을 당한다.
라자스는 욕망과 집착에서 생기는 격정적인 기운이다.
라자스의 격정적인 활동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소유주인 참 자아가 속박을 당한다.
타마스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어두운 기운이다.
타마스의 어두운 힘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소유주인 참 자아가 미혹에 갇힌다.
모든 존재들이 이 기운으로 말미암아 둔함과 게으름과 잠에 빠진다.
아르주나여, 삿트바는 그대를 행복에 집착하게 하고, 라자스는 그대를 활동으로 몰아넣으며, 타마스는 그대의 지혜를 덮어 미혹에 빠지게 한다.
어떤 때는 밝고 고요한 기운이 활동적인 기운과 어두운 기운을 제압한다.
어떤 때는 활동적인 기운이 밝고 고요한 기운과 어두운 기운을 압도한다.
어떤 때는 어두운 기운이 활동적인 기운과 밝고 고요한 기운을 집어삼킨다.
삿트바의 밝고 고요한 기운이 우세할 때는 육체의 모든 세포가 지혜의 빛으로 밝아진다.
라자스의 활동적인 기운이 우세할 때는 이기적인 욕망과 집착, 불안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활동으로 내몰린다.
타마스의 어두운 기운이 우세할 때는 무지와 혼란과 게으름과 망상에 빠진다.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삿트바의 밝고 고요한 기운이 우세하면 그는 현자들이 사는 순수한 곳(신들의 차원)으로 간다.
라자스의 활동적인 기운이 우세하면 그는 행위가 지배하는 세상(인간차원)에 태어난다.
탐스의 어두운 기운이 우세하면 그는 무지한 존재(짐승차원)의 자궁으로 들어간다.
선한 행위는 밝고 고요한 기운의 열매이며, 고통은 활동적인 기운의 열매이고, 무지는 어두운 기운의 열매이다.
지혜는 밝고 고요한 기운에서 생기고, 탐욕은 활동적인 기운에서 생기며, 무지와 혼란과 미망은 어두운 기운에서 생긴다.
밝고 고요한 기운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위에 있는 세계로 가고, 활동적인 기운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며, 어두운 기운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아래에 있는 세계로 간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모든 행위가 세가지 기운의 활동임을 안다.
그러나 물질 차원의 세 기운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의 상태에 이른다.
육체에서 비롯되는 물질의 세 가지 기운을 초월하는 사람은 생, 노, 병, 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불멸의 자유를 얻는다.
물질차원의 세 기운을 초월한 사람은 밝으면 밝은 대로 놔 두고, 활동적이면 활동적인 대로 놔 두며,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놔 둔다.
어떤 상태를 싫어하거나 갈구하지 않는다.
그는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구경꾼처럼 물질의 기운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 활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모든 행위와 활동이 물질적인 기운의 활동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 머물러 있다.
아르주나여, 나는 그대에게 가장 깊은 진리를 전해주었다.
이 가르침을 깨닫는 사람은 지혜를 얻는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모든 의무를 완수한 것이다.
아르주나여, 두려워하지 마라.
마음을 깨끗하게 지켜라.
영적인 수행의 길에서 흔들리지 마라.
대가를 바라지 말고 베풀어라.
감각의 욕구를 절제하라.
신실한 마음으로 신을 섬겨라.
경전을 탐구하여 진리를 깨달아라.
집착을 버리고, 포기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려라.
누구를 향해서든 분노하거나 해치지 마라.
모든 존재를 자비로움으로 대하라.
욕심을 부리지 말고 선을 행하라.
강인한 정신력과 인내심과 순결함을 키워라.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마라.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 하라.
그러면 그대의 신적인 성품이 완성될 것이다.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신을 숭배한다.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부와 권력을 숭배한다.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귀신을 섬긴다.
어떤 사람은 가혹한 고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선과 이기심으로 행하는 고행은 애꿎은 육체만 괴롭히는 것이며, 몸 안에 머물고 있는 나를 괴롭히는 행위이다.
야망에 휩싸인 채 별별 희한한 고행을 다하고 있는 저들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마와 같다.
기질과 믿음에 따라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고, 제사 드리는 태도와 방식도 다르며, 영적인 수련 태도가 다르다.
또 베푸는 태도 역시 기질과 믿음에 따라 다르다.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부드럽고 신선하고 제 맛이 살아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이들은 활기를 돋우고 기운을 맑게 하며 건강을 증진시키는 음식을 좋아한다.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짜거나 쓰거나 매운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한다.
이런 음식은 고통과 병의 원인이 된다.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타거나 상하거나 신선하지 않은 음식을 좋아한다.
이들은 대체로 제 맛을 잃어버린 음식을 좋아한다.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순수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린다.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또는 남에게 봉기 위해서 제사를 드린다.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규범에 따르지 않고 자기 맘대로 제사를 드린다.
이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규정된 신성한 제물도 바치지 않으며 사제들을 대접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드리는 제사에는 도무지 믿음이 없다.
몸의 고행은 이런 것이다.
신과 지혜로운 사람과 영적인 스승을 섬기는 것, 청결함과 단순함과 절제와 비폭력, 이런 것이 몸의 훈련이다.
말의 고행은 이런 것이다.
위로하는 말과 진실되게 말하는 것, 친절하고 힘을 주는 말을 하는 것, 규칙적으로 경전을 낭독하는 것, 이런 것이 말의 훈련이다.
마음의 고행은 이런 것이다.
고요함과 부드러움과 침묵을 지키는 것, 자기를 제어하고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 이런 것이 마음의 훈련이다.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지극한 믿음으로,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이 세가지 훈련을 한다.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또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 고행을 한다. 이들이 하는 고행은 지속성이 없다. 상황에 따라 변한다.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것이 영적인 행위라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고행을 한다.
기질이 밝고 고요한 사람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당연히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베푼다.
그들은 적당한 때, 적절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기질이 격정적인 사람은 어떤 호의적인 대가를 기대하면서, 마지못해 자선을 베푼다.
기질이 어두운 사람은 때와 장소가 적절치 못한 상황에서, 적당하지 않은 사람에게, 애정이나 존중하는 마음도 없이 자선행위를 한다.
그러나 아르주나여, 믿음이 없이 행하는 제사와 고행과 자선은 ‘아사드’라고 한다.
‘아사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아사드’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아무 쓸모가 없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포기는 자기가 바라는 결과를 기대하는 행위, 곧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를 기대하는 사람은 즐거움과 괴로움과 그 중간, 이 세 가지 열매를 번갈아 맛본다.
그러나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사람은 행위나 행위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초월적인 자유를 누린다.
모든 존재들 속에서 하나의 불멸의 실재를 보며, 분리되어 있는 만물 속에서 분리되지 않은 통일성을 보는 것, 이것이 밝고 고요한 기운에서 비롯되는 앎이다.
만물을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개체로 인식하는 것, 이것은 격정적인 기운에서 비롯되는 앎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아주 작은 부분을 전체로 아는 것, 이것은 어두운 기운에서 비롯되는 앎이다.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이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 마음으로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행하는 것, 이것은 밝은 기운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 이것은 격정적인 기운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행위의 결과로 오게 될 손실이나 다른 사람의 받을 고통이나 상처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도 모르는 상태에서 닥치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것은 어두운 기질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이기심을 벗어난 사람,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성공과 실패를 똑같이 여기는 사람은 밝고 고요한 기운이 행위자이다.
개인적인 욕망이 강한 사람, 행위의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 순수하지 않은 에너지로 들끓고 있는 사람, 그리고 행복과 불행에 웃고 우는 사람은 격정적인 기운의 행위자이다.
자신을 전혀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 저속하고 완고하고 남을 속이는 사람, 게으르고 낙담을 잘하며 질질 끄는 사람은 어두운 기질의 행위자이다.
아르주나여, 잘 들어라.
내 이제 그대에게 물질의 세 가지 기운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세 종류의 지성과 의지에 대해 말해주겠다.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것,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아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안전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안전하지 못한지를 아는 것, 어떻게 하면 자유롭고 어떻게 하면 굴레에 얽매이는지를 아는 것, 이런 것은 밝고 고요한 기운에서 비롯되는 지성이다.
옳은 행위와 그른 행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위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 이런 것은 격정적인 기운에서 비롯되는 지성이다.
무지와 미망의 어둠에 뒤덮여서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것, 모든 것을 왜곡해서 아는 것, 이런 것은 어두운 기운에서 비롯되는 지성이다.
명상훈련과 수행을 통해 생명의 기운과 마음과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는 것, 이런 것은 밝은 기운의 의지력에서 비롯된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고 부와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며 이기적인 욕망을 좇는 것, 이런 것은 격정적인 기운의 의지력에서 비롯된다.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게으름, 두려움, 좌절, 의기소침, 자만심 등에 깊이 빠져있는 것, 이런 것은 어두운 기운의 의지력에서 비롯된다.
아르주나여, 잘 들어라.
내 이제 그대에게 물질의 세 가지 기운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세 종류의 행복에 대해 말해주겠다.
이것을 알고 훈련함으로써 그대의 슬픔은 끝나리라.
밝고 고요한 기운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은 처음에는 독약처럼 쓰지만 마지막에는 감로처럼 달다.
참 자아를 깨닫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이런 행복감이 온다.
격정적인 기운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은 처음에는 감로처럼 달지만 마지막에는 독약처럼 쓰다.
감각적인 쾌락에서 오는 즐거움이 이런 행복감이다.
어두운 기운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은 영적인 무지와 게으름과 흥분에서 온다.
이런 행복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를 미혹하게 하여 마음의 빛을 가린다.
물질차원의 세 가지 기운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하나도 없다.
땅에 있는 존재나 하늘에 있는 신들이나 아무도 물질의 세 가지 기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은 타고난 기운에 따라 각기 다른 사회적 의무를 갖는다.
브라만은 사제로서의 의무를, 크샤트리야는 통치자와 전사로서의 의무를, 바이샤는 일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그리고 수드라는 보조자로서의 의무를 갖고 있다.
자기의 의무가 아닌 일을 기가 막히게 잘 해 내는 것보다는 비록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편이 낫다.
자기의 의무를 완성한 사람은 결코 고통과 슬픔의 세계로 가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타는 불이 연기로 뒤덮여 있듯이 결함으로 뒤덮여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서 부족한 점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의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