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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의 편지..
"현재 폭풍은 동해안으로 향하고 있으니 피서객은 각별한 주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태풍은 A급 태풍으로.... "
라디오는 여전히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잠이 깬 듯 졸리운 눈으로 나를 한번 보고 싱긋 웃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정말 큰 마음 먹고 온 여행인데... 하필 폭풍이라니. 젠장.
창 밖으로는 한 길도 넘게 넘실대는 바다와,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비스듬하게 유리를 때리는 빗방울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와 파란 바람에 대한 기대가 여지없이 깨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 기분좋은 일이 아니다.
" 이제 다 왔어? "
" 아니. 조금만 더 가면 돼. "
" 그럼 나 조금 더 잘께.... "
그래, 라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다시 고개를 파묻는 그녀를 보며 난 빙긋이 웃음지었다. 그래. 어쨌든 여행은 혼자 하는게 아니니까 괜히 내가 기분 나빠해서 그녀까지 기분 나쁘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그녀와 나 둘 만을 덩그러니 남겨 놓고 횡횡히 갈길을 가 버렸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산을 받쳐들기 힘이 들었다. 자꾸 뒤로 뒤집히는 우산은 '나는 폭풍과 맞서기엔 너무 연약해요. 그냥 포기하고 비 맞으세요' 라고 빈정거리듯 귓속말을 건내고 있었다. 하지만, 폼으로라도 우산을 버릴 수 없어 고집스럽게 우산대를 잡고 20여분을 걸어 민박집에 도착했다.
"계세요? "
"아, 예약한 분들이시구만. 고생했수. 얼른 들어와요. "
"네. "
"폭풍 때문에 다들 예약을 취소해서, 아마 한동안 나가지도 못 할텐데.괜찮겠수? "
"그래도 여행 취소할 수가 없어서요. 괜찮습니다. "
"이구... 바람이 하두 불어서 비를 다 맞았구만. 내 옥수수라도 좀 삶아올테니, 들어가요. "
그녀와 나는 민박집 아주머니가 참 친절해서 좋다는 무언의 눈빛을 건낸 후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리를 뻗고 4명정도가 잘 수 있는 크기. 하지만, 오히려 크면 큰대로 을씨년스러울테니 둘이 지내기엔 딱 그 정도가 좋았다.
아주머니가 가져오신 옥수수를 먹고, 안받으시겠다는 손에 억지로 얼마의 돈을 쥐어드린 후, 우리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요번 태풍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기상 캐스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기상 캐스터는 자기가 이렇게 오랜 시간 화면을 점령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얼마 정도는 폭풍에 감사하는 듯이 보였다. 물론 착각이겠지만.
그렇게 방 안에서 3일이 지났다. 텔레비젼을 보고, 라디오를 듣고, 아주머니가 해 주시는 밥을 먹고, 가끔 화장실에 가고, 그게 전부였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둘이 싸움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남들이 말하는 "아무 일" 이라면, 우리는 이미 1년 전에 거쳤다.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가 기차가 끊겼고, 그래서 여관에서 자다가 어찌어찌해서..
그런 틀에 박힌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갔다. 같이 자는 게 어색하지 않은 사이. 아주 오래된 연인들. 그게 우리 사이였다.
" 그런데 그냥 이렇게 방에만 있다가 가?"
그녀가 내 팔을 베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 그럼 어떡해. 바람 때문에 넌 날아갈지도.. 아니다. 안날아가 겠다. 요새 살쪘잖아. 배도 좀 나오구. "
꼬집..
" 야야, 아퍼.. "
그녀는 모른 척 하고 이야기를 계속 했다.
" 뉴스 보니까 내일 폭풍의 눈이 동해안을 지나간대. 그럼 바람이 좀 잔잔해질꺼 아냐. 우리 그때 바다 보러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때문에 바다도 못 만져보고 가면 너무 슬프잖아. 응? "
" 그래, 그럼. "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래, 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느즈막히 일어난 우리는 지금까지 창문을 울리던 귀신소리같던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알았다. 비도 쏟아붇듯 내리던 것이 이젠 보슬비 정도로 바뀌었다. 신기했다. 이게 태풍의 눈인가.
" 우리, 나가자. "
" 응. "
그녀와 나는 3일만에 처음으로 민박집을 나와 바닷가로 향했다. 민박집 아줌마는 파도가 거세질 것 같으면 얼른 돌아오라는 염려어린 당부를 했지만, 그 말은 고이 접어서 머리 한구석에 쳐박아 두었다.
" 와.. 그렇게 파도가 세더니 지금은 잠잠하네? "
" 그래도 우리 가기 전에 한번 보고 가라고 하늘이 인심쓰나 보다."
" 그러게. 훗... "
그녀와 나는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그 넓은 해안에 우리 둘 뿐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지만, 이전처럼 암울한 회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끔 파도가 살며시 치는 바다로 들어갔다가,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는, 다시 내게로 와서 방긋이 웃었다.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려주고는, 나도 웃었다. 그리고 얼마를 더 걷다보니 파도가 조금 거세진 것 같았다. 나는 아까 머리속에 쳐박아두었던 아주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 우리 돌아가자. 파도가 아까보다 거세진 것 같아. "
" 응..잠깐만. 아, 저기 있다. "
그녀는 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갑자기 주저 앉더니 품에서 무얼 꺼내는 듯 싶었다. 그 순간이었다. 저 멀리에서 조금씩 겹쳐지던 파도는 무서운 기세로 해안을 향해 달려왔고, 그녀의 머리 위로 1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해일이 그녀를 뒤덮으려 하늘 높이 치솟았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웃은 그 순간, 그 파도는 그녀의 몸을 덮쳤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해안경비대가 그녀의 시신을 찾으려고 바다를 수색했지만, 그녀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폭풍 때문에 그녀가 사라진 지 며칠 뒤에 수색을 시작했기 때문에 발견될 꺼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막상 행방불명으로 처리해야 겠다는 수색대원의 말을 듣고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잠을 자면 갑자기 파도가 밀려오고, 그럼 그 뒤에서 그녀가 웃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식은 땀을 흘리며 주전자를 들어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지만, 여전히 마지막 그 기억은 생생하게 내 머리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 후 1년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부모님들은 그래도 내가 괜찮은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속이 썩어버린 달팽이였다.
그녀의 부모님이 오열하시며 내 가슴을 치던 그 날, 내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하지만 시간은 얼마나 냉정한가.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서 나는 사랑을 고백하던 볼이 붉은 여자 후배와 결혼을 했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낳았고, 이마에 주름살이 생겨났고, 머리숱이 적어져 갔다.
하지만 그녀를 잊지는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식은 땀을 흘리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는 차마 예전에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고, 그 여자가 그렇게 죽었다고, 아니, 행방불명되었지만 죽었을꺼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 날은... 무척이나 추운 봄 날이었다.
회사에서 급히 강릉 대리점에 결산 보고서를 확인하고 오라는 출장 명령을 받던 날, 나는 무척이나 가슴이 떨렸다.
폭풍이 불던 그 날 이후로 단 한번도 동해안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다행이 결혼한 그 여자가 등산을 좋아해서 지금까지 피서는 전부 산이나 계곡으로 갔었다. 출장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피하기 싫었다. 언젠가 한번은 가 보아야 할 장소 아닌가. 20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그 장소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을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 생각은.
서류를 검토하고 별 문제 없음을 회사에 보고한 뒤에, 나는 버스를 타고 그 민박집이 있던 마을에 내렸다.
20년 전엔 둘이서 같이 내렸던 곳에 이번엔 혼자서 덩그러니 내렸다. 내게 머리를 기대고 졸리운 눈으로 웃던 그녀의 표정이 잠깐 머리를 스쳐갔다.
20년 전의 민박집을 찾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충 위치는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길이 전부 바뀌고 집도 전부 바뀌어서 도저히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한동안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찾는 걸 포기하고 바닷가로 발걸음을 향했다.
바다는 20년 전 그대로였다.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바다는 파도 하나 하나까지 똑같았다. 폭풍의 눈 속에 잔잔하던 그 파도가 그대로 여기 다시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예전에 했던 그대로 바닷가를 따라 쭉 걸었다.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았다.
그냥.. 슬펐다.
그리고 계속 걷다보니, 그 장소에 오게 되었다.
바로 그 장소. 그녀가 파도에 휩쓸려간 그 장소.
문득 나는 궁금해 졌다. 그녀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반갑게 앞으로 달려나가 모래사장에 앉았던 이유를 한번도 궁금해 해 본적이없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아 손을 턱에 괴고 왜 그녀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내 발 옆에 무언가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병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호기심으로 나는 그 병을 모래 속에서 꺼내 보았다.
그 병 속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럴리는 없었다. 설마 이 편지가 그녀가 남긴 편지일리는 없었다.
바다로 휩쓸려간 이 병이 지구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이 장소로 왔고, 그 병을 내가 보게 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내가 그녀 생각을 하며 앉은 바로 이 자리에 그 병이 놓여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막힌 병을 깨뜨리고 노랗게 퇴색된 편지를 펴 보는 순간... 나는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분이 누가 되실지는 모르지만, 제 비밀 하나를 알게 되신 걸 축하드려요. 저 임신했어요."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바다 속에서 내가 이 편지를 보아 주기를 20년 동안 기다렸을 것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차가운 바다 속에서 이 편지를 보아 주기를... 20년 동안 기다렸을 것이다.
" 이제 됐어... 미안해. 늦게 와서. 그리고... 사랑해.. "
나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 기다렸어. 오랫동안...."
그녀도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봄바람은 차갑게 나를 감싸고 바다를 향해 불었다.....
물망초 첫번째 이야기
가버린 추억 속에 우연히 만난 소녀 꽃처럼 어여쁜 꿈 간직한 소녀였지. 밤 하늘 바라보며 별이 되고 싶어했고
그 까만 두 눈동자엔 사랑 가득 담았었지. 내민 손 살며시 쥐어주면은 얼굴을 붉히면서 잡은 손 꼭 쥐고 잊지 말라며 고개를 떨구던 너. 가슴 속 시린 눈물 속으로 삼키면서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내게로 달려왔지.
물망초 건네주며 꽃말을 얘기했고 안개꽃 꽂아주면 한 없이 기뻐했지. 내 품에 안기어 미소 지으며 저 멀리 떠난 소녀. 고운 꿈 그대로 간직한 채로 밤 하늘 별이 된 너.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검푸른 바닷가에서 별이 된 너의 영혼을 바람결에 실어 보냈지. 열 다섯 사랑을 안고 피다말고 져버린 소녀야. 사랑이 무어냐고 나에게 물었었지. 사랑이 무언지 잘은 몰라도 너를 향한 이 내 마음 사랑이 아니라고 몸부림 쳐도 자꾸만 그리워지는 이 마음 사랑이야. 이 내 마음 사랑이었어. 사무치게 그리워짐은 난 너를 사랑한 거야.
열 다섯 사랑을 안고 피다말고 져버린 소녀에게, 그리고 이제는 내 가슴속에서 조차 죽어 추억이 되어버린 어느 순결한 소녀에게 이 노래와 글을 바칩니다.
나는 지금 한 소녀를 추억하고 있다. 이젠 아스라이 저 먼 곳의 기억 속에 잔잔한 슬픔으로 남아 있는 추억 속의 소녀를...
오빠, 사랑이 뭐야?
사랑?
그래, 사랑이 뭔지 오빤 알아?
또 무슨 소릴 하려고 그래? 난 아직 사랑을 안 해봐서 몰라.
바보, 난 아는데.
조그만 게 알긴 뭘 알아?
피이, 조그맣다고 사랑도 모를까? 사랑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야. 오빠를 만나면 경아는 가슴이 두근거리거든.
너 계속 까불 거야?
난 경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가끔 짓궂은 질문으로 나를 당황하게 하는 경아가 귀여웠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적은 경아는 어느새 나의 작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내가 경아를 만난 것은 한 달 전 소래에서 였다. 소래에는 좁은 바다가 있었고 그 바다를 가로지르는 철길로 된 다리가 있었다. 철길이기는 했지만 기차가 다니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다리는 상판이 침목으로 만들어져 밑이 훤히 보였는데 웬 만큼 강심장을 가진 여자라도 건너려면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가끔 혼자 여행을 즐기던 나에겐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보다 더 험한 곳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닌 경험이 있었기에 그 정도의 다리는 뛰어 건널 수도 있었다. 내가 다리를 건너려고 다리 입구에 다가갔을 때였다.
오빠, 나 업고 여기 건널 수 있어?
아주 귀엽게 생긴 단발머리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소녀는 건너기가 무서워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아주 어리지도 않은 소녀가 반말로 업어달라는 말이 어색하거나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그건 소녀가 너무도 천진난만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혼자 건너기가 무서우니?
응. 그렇지만 건너고 싶어.
그래, 그럼 업혀.
난 처음 보는 그 소녀에게 등을 돌렸다. 소녀는 주저 없이 내 등에 업혔다. 보기보다 상당히 가벼웠다. 마치 나무로 된 인형 같았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말 없이 다리를 건너는 일에 열중했다. 다리 중간 쯤 왔을 때 내 목에 두른 소녀의 팔에 힘이 가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두려움을 느꼈는지 내 목을 꽉 끌어 안았다. 난 조금이라도 안정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소녀의 다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다리를 다 건넜는데도 소녀는 내 등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이제 다 건넜어. 그만 내려.
어머, 벌써 다 건넜어?
소녀는 눈을 감고 있다가 내가 내리라는 말에 눈을 뜨고 얼른 등에서 내려왔다.
오빠 고마워.
고맙긴 뭘. 무서웠지?
조금 무서웠어. 오빠, 우리 저 쪽에 가 보자.
소녀가 가리킨 곳엔 좀 넓은 바다를 향해 방파제처럼 생긴 둑이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소녀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자연스레 소녀와 난 손을 잡고 걷게 되었다.
근데 오빠 이름이 뭐야?
이상했다. 소녀가 내 이름을 모른다는 것과 내가 소녀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소녀를 업은 내 행동과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고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모른 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됐다. 마치 소녀와 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 이름은 태수야. 김태수. 넌 이름이 뭐니?
난 경아. 윤 경아. 근데 오빤, 아무나 그렇게 잘 업어줘?
아니. 경아는 아무에게나 업어달라고 조르니?
나도 아냐. 난 업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에게만 부탁해. 그런 느낌이 든 사람은 오빠가 처음이지만.
경아는 몇 살이지?
열 다섯 살. 오빤?
스무 살. 근데, 너 혼자 왔니?
아니, 엄마랑 아빠랑 동생이랑 같이 왔어.
다 어디 계셔?
몰라. 좀 있다 만나기로 했어.
경아와 난 그렇게 만났다. 돌아 올 때도 난 경아를 업고 다릴 건넜고 그 광경을 경아의 부모님에게 목격되어 인사를 하게 됐다. 경아의 부모님은 사람이 무척 좋아 보였다. 경아에겐 남 동생이 있었는데 부모님은 동생보다 경아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무슨 근심이 있는 듯 밝게 웃는데도 그늘이 느껴졌다. 그 날 이후 경아와 난 자주 만났다. 내 자취방과 경아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로 겨우 세 정거장 떨어져 있었다. 난 혼자 자취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자주 찾아왔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은 무슨 행사처럼 내 방을 들렀다가 집으로 갔다. 학교와 가까운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고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그들이 자주 찾는 이유였다. 친구 중엔 남자들도 있었지만 여자들도 있었다. 친구들이 한 번 왔다 가면 난 한 동안
청소와 씨름을 해야 했다. 그 날도 언제나 처럼 친구들이 한 바탕 분탕질을 해 놓고 간 후 청소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저, 거기 태수 오빠 있어요?
전데요.
오빠, 나야 경아.
어, 경아구나. 거기 어디야?
내가 그 쪽으로 갈께, 위치 좀 알려줘.
난 찾기 쉬운 곳을 알려 줬고 잠시 후 경아를 만났다. 경아는 수업을 끝내고 곧바로 온 모양인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너 학교에서 곧 바로 오는 거니?
응. 근데 오빠 집이 어디야?
여기서 가까워.
그럼 우리 오빠 집에 가자.
지금 좀 지저분한데.
어때? 내가 치워줄게.
경아는 약속대로 나와 함께 청소를 했다. 그리고 마치 자기집처럼 스스럼 없이 쌀을 꺼내다 밥을 짓고 냉장고를 뒤져서 찌개를 끓이고 상을 차렸다. 그런 경아의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마치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친 동생처럼 느껴졌다.
오빠, 내 찌개 솜씨가 어때?
아주 좋아. 시집가도 되겠다.
정말이야? 정말 맛있어?
그래, 정말 맛있어. 그런데 언제 이런 걸 다 배웠니?
응, 난 요리가 취미거든. 가끔 집에서 동생에게 이것 저것 만들어 주기도 해.
정말 경아의 음식 솜씨는 좋았다.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 여자 애의 음식 솜씨라 하기엔 믿기 지 않을 정도였다. 식사를 끝낸 후 경아는 설거지를 했다. 내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설거지를 끝낸 후 경아는 커피를 끓여 방으로 들어왔다.
오빠, 혼자 자취해?
응. 나 혼자 살아.
심심하겠다.
심심하지만 견딜만 해. 혼자 있으니까 공부하기도 좋고.
오빠, 공부 잘해?
잘하지는 못해.
나 가끔 여기 와서 오빠에게 과외 받아야겠다.
내가 널 가르칠 실력이 될런지 모르겠다.
오빠가 실력이 안 되면 경아가 오빨 가르치지 뭐.
경아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귀여웠다. 경아는 온통 귀여움으로 만들어진 소녀 같았다. 우린 좀 더 떠들며 시간을 보낸 후 방을 나왔다. 경아를 집 앞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오려는데 경아가 집에 들어갔다 가 가라고 졸라 결국 경아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과일을 얻어 먹은 후에야 집에 돌아 올 수 있었다. 그 후 경아는 자주 내 방에 들렀다. 오히려 내 친구들 보다 더 자주 들렀지만 친구들과는 달리 어지럽히는 대신에 청소를 했고 외식을 하지 않는 날에는 반드시 식사를 준비했다.
내가 하려고 했지만 경아는 자기가 있는 날에는 날 주방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사실 내가 만든 음식은 웬만큼 배고픈 애완견은 거들떠 보지도 않을 만큼 맛이 없었다. 그렇기에 혼자 있을 때라면 몰라도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할 땐 내가 만든 음식으로 상을 차리기가 좀 그랬다. 친구들도 내 음식 솜씨를 알기에 내 방에서 식사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라면을 끓여 먹기는 했지만 식사를 하지는 않았다. 경아는 김치를 가져다 주기도 하고 밑반찬을 만들어 가지고 오기도 했다. 열 다섯 살 여자 아이가 냄새를 풍기며 김치 통을 들고 버스에 오른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련만 경아는 김치가 떨어지기 무섭게 가져왔다. 가끔 빨래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건 너무 미안해서 빨래가 밀리지 않도록 그날그날 빨아 입게 되었다. 빨래를 하다가 들키게 되면 경아의 눈이 곱지 않았다.
경아는 어느새 나보다 내 살림을 더 잘 알게 되었고 무엇이 필요한 지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가끔 내가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에도 경아가 왔다 간 흔적이 있었다. 어지럽히고 나간 방안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밥과 찌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짧은 쪽지가 남아 있었다.
물망초 두 번째 이야기
오빠, 경아 왔다가 그냥 감. 아직 식사를 안 했을 리는 없고 내일 아침에 먹기 바람. 만일 외박을 했다거나, 내일도 늦게 들어오면 최하 사망. 헤헤 그럼 오빠 잘자.
이런 식의 짧은 글이 남겨져 있었다. 경아와 나는 함께 공부를 하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내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더러는 우리 학교 캠퍼스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친구들과 경아가 만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경아가 오는 시간과 친구들이 들르는 시간은 좀 차이가 있었기에 아직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경아가 오기 시작한 후 난 친구들이 내 방에 오는 걸 좀 삼가하게 했다. 친구들이 오는 시간에 집을 비워 아예 들어가지 못 하게 했다.
경아에겐 키가 있었지만 친구들에겐 없었기에 내가 방을 비우면 친구들은 내 방에 들어 올 수 없었다. 친구들이 귀찮아서는 아니었다. 나의 작은 친구 경아에게 미안해서 였다. 그들이 어지럽힌 방을 청소해야 하는 경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되도록이면 친구들을 방에 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친구들은 거의 내 방을 찾지 않게 되었다. 경아는 일주일 중 월요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 오다시피 했다. 월요일 외에도 아주 가끔 안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월요일을 제외하곤 거의 만날 수 있었다. 월요일 하루는 자기 방을 청소하고 정리를 하는 날로 정해 놓아 못 온다고 했다.
오빠, 키스 해봤어?
책을 보던 경아가 갑자기 물었다. 장난기가 또 발동한 것이었다.
키스? 아직 못해봤다. 왜!
대학생이 아직 키스도 못해봤어?
임마, 키스하러 대학교에 가는 줄 알아?
난 대학교에선 키스도 가르쳐 주는 줄 알았지. 근데 아니구나.
경아는 귀엽게 웃었다. 경아의 이런 질문에 이제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나도 맞장구를 칠 수 있었다. 열 다섯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키스란 말이 징그럽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경아의 천진스러움 때문이었다. 경아는 맑았다. 이른 새벽 들풀에 내려앉은 이슬처럼 맑고 투명한 영혼을 간직한 소녀였다. 경아를 색으로 표현하면 흰색이었다. 아직 아무런 물도 들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흰색.
백지였다. 아직 아무런 그림도 그려지지 않은, 그리고 아무런 낙서도 되어 있지 않은 순결한 백지. 그렇기에 경아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도 역겹게 들리지 않았고 좀 어른스러운 말을 해도 순수하게 들렸다. 이제 막 말을 배운 어린아이가 욕을 해도 그다지 욕으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귀여움이 느껴지듯 경아가 그랬다.
오빠, 경아가 키스하는 법 가르쳐 줄까?
어떻게?
입술 이리 대 봐.
경아는 경험이 있나 보지?
경험은 없지만 영화에서 많이 봤어. 자, 떨지 말고 이리 와.
이게, 또 까불고 있어.
아야! 좋은 걸 가르쳐 준대도 때리네.
내가 경아의 이마에 알밤을 한 대 먹이자 경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오빠, 경아 호ㅡ오 해줘.
경아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마를 디밀었다. 그런 경아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난 이마에 입을 맞췄다.
오빠, 키스는 이마에 하는 게 아니라 입술에 하는 거야.
그만 까불고 공부나 해.
난 늘 경아를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다. 늦은 날에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경아 부모님께 반드시 인사를 드리고 왔다. 경아의 부모님도 나를 무척 잘 대해 주셨다. 가끔 경아의 방에서 경아의 남동생 경호와 셋이서 함께 공부를 할 때도 있었다. 경아의 동생도 나를 잘 따랐다. 초등 학교 6학년 밖에 안된 아이였지만 제법 어른스러웠다. 마치 경아의 오빠처럼 행동했다.
경아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랐고 심부름을 시키면 아무 불평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경아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들어주려 애썼다. 그렇다고 경아가 응석받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가족들이 경아에게 신경 쓰는 것 보다 경아가 가족에게 더 신경을 쓰는 지도 몰랐다. 그 가정은 어떤 가정보다 평화롭고 정이 넘쳐 보였다.
아주 예민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어떤 그늘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리 대수롭게 여겨지진 않았다. 그렇게 난 나의 작고 어린 친구와 우정을 쌓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난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사실 난 당시 내 친구들과 경아가 만나게 될까 봐 좀 조심했다.
친구들에게 오해를 받기가 싫었다. 아무리 경아가 어리다지만 경아는 여자였고 나는 남자였다. 더구나 거의 매일 집에 와서 함께 살다시피 하는 걸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오해할게 빤했다. 나라도 곁에 그런 친구가 있다면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중학교 2학년의 여자와 한데 묶여서 의심 받기는 정말 싫었다. 설령 사랑의 끈으로 묶여있다 해도 주위의 시선은 사랑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상식 속에서만 모든 걸 생각하고 결정 짓는 습성이 있으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밖의 세상은 들여 다 보려 하지도 않고 인정하려 들지도 않는다. 분명 다른 세상이 존재 하는데도. 나 또한 예외는 아니기에 친구들과 경아의 대면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노력은, 나 만의 비밀 아닌 비밀은 채 두 달이 안되어 친구들에게 들통나고 말았다. 경아가 집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여자 친구 둘과 남자 친구 둘 그리고 나 다섯이서 오랜만에 내 자취방을 찾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창 수업을 받고 있어야 할 경아가 와 있었다. 맨 앞에 가던 미애가 입을 열었을 때도 나는 경아가 와 있으리란 생각을 못 했다.
태수야, 너 아침에 문 안 잠그고 갔니?
잠그고 갔을 텐데. 왜, 열려있니?
어머, 누가 있는데.
난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 경아였다.
어, 네가 이 시간에 웬 일이야?
어머, 오빠 친구 분들도 오셨네.
인사해라, 내 친구 경아야. 그리고 경아야, 이 쪽은 오빠 친구들이야.
안녕 하세요, 경아라고 해요.
안녕. 태수 친구야.
내 친구들과 경아의 첫 대면은 그렇게 이루어 졌다.
야 태수 너, 이 꼬마 아가씨 때문에 그 동안 우릴 못 오게 했냐? 이 엉큼한 녀석.
해도 너무 한다. 역시 내가 걱정하던 대로 녀석들은 야릇한 시선으로 나와 경아를 쳐다봤다. 왜 친구들은 경아의 그 하얀 천진스러움을 보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임마, 니들이 상상하는 그런 사이가 아냐. 아무려면 내가 이렇게 귀엽고 예쁜 경아에게 상처를 입히겠냐?
오빠, 상처가 뭐야?
야, 니들 우리 순진한 경아 앞에서 이상한 소리 말고 조용히 놀다 가라.
친구들과 경아는 잘 어울렸다. 어느 정도 경아를 알게된 친구들은 경아의 맑고 깨끗한 영혼을 느꼈고 의심의 눈을 풀었다.
언니, 미팅 해 봤어?
어느새 경아는 미애와 친해져 있었다. 다른 내 친구들에게는 존대말을 하면서 미애에겐 말을 놓았다.
미팅이야 많이 해 봤지.
미팅하면 재밌어?
재미있을 때도 있고, 재미 없을 때도 있지.
경아는 아직 미팅 못 해 봤나 보구나.
데이트는 많이 해봤는데 미팅은 못 해 봤어.
누구랑 그렇게 데이트를 많이 했어?
오빠랑. 언니 다음 미팅 때 나 좀 데리고 가라.
미팅하는데 널 어떻게 데리고 가니?
좀 시간이 흐른 후 친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둘 만 남겨두고 가도 괜찮겠냐?
친구 중 한 녀석이 웃으며 말 했다. 난 녀석의 등을 떠밀며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친구들이 간 뒤 우린 식사를 했다.
오빠, 미애 언니 예쁘더라.
좀 예쁜 편이지. 그런데 너 오늘 학교에 안 갔니?
갔다 가 좀 일찍 왔어. 오빠, 나 땜에 곤란했지?
아니, 괜찮았어. 경아 땜에 내가 곤란 할게 뭐 있어?
아까 언니하고 오빠들이 이상하게 생각 하는 것 같던데.
뭘 이상하게 생각해? 조그만 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내가 왜 조그마? 나도 알건 다 안단 말이야.
그만 까불고 공부나 하자.
싫어, 오늘은 공부하기 싫어.
공부하기 싫어서 조퇴하고 왔는데 여기서 공부하란 말이야?
그럼 뭐 할 거야?
우리 나가서 데이트 하자. 오빠 손 잡고 막 쏘다니고 싶어. 그래서 일찍 왔단 말이야.
잠시 후 경아와 난 학교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밤 하늘이 무척 맑았다. 맑은 기회를 틈 타 수 많은 별들이 얼굴을 내밀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빠, 하늘 좀 봐. 별이 참 곱다.
그래, 오늘은 유난히 별이 많이 나왔는걸.
오빠, 난 별이 됐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 아주 가끔 별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란 생각을 해. 별은 많은 걸 볼 수 있을 거야. 그치?
경아 너답지 않게 무슨 소리야?
나다운 게 어떤 건데?
음, 경아 너 다운 건 까불고 가끔 짓궂은 질문으로 날 놀리는 아주 못 된 망아지지.
오빤 아무것도 모르면서 까불고 있어. 이 모습이 원래 내 모습이야. 별이 되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볼 수 있을 거야. 난 별이 되면 오빠 방 창문에 매일 머물 거야.
넌 지금도 매일 내 방에 오잖아. 굳이 별이 될 필요가 뭐 있어?
이러니까 남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린애란 말을 듣지! 경아 기분 깨뜨리지 말고 듣기나 해.
물망초 세 번째 이야기
경아는 평소와는 좀 달라 보였다. 평소처럼 까불기만 하는 경아가 아니었다. 좀 청순하고 조금은 엄숙함 마저 느껴지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별을 얘기하던 경아가 살며시 내 어깨에 몸을 기대왔다. 난 거부감 없이 한 팔로 경아를 살며시 끌어 안았다. 경아답지 않았다. 지금 내 팔에 안겨있는 경아는 내가 알고 있는 경아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경아는 내가 살며시 안았다 해서 이렇게 떨지는 않을 테니까.
경아는 떨고 있었다. 아주 작은 떨림이었지만 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음이 느껴졌다. 밤이라서, 인공 불빛이라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경아의 얼굴엔 엷은 홍조가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 귀엽고 예쁜 나의 작은 어린 친구는 내 품에 안겨서 떨고 있었다.
오빠, 사랑이 무슨 색인지 알아?
몰라. 아마 핑크 빛이겠지.
그럼 이별은 어떤 색이라 생각해?
이별의 색깔은 상상이 되지 않는 걸.
잘 생각해봐.
음, 잘 모르겠다. 그냥 연한 파란색 정도.
아냐, 이별은 재 빛이야. 그리움은?
그리움은 보라색 정도.
아냐. 그리움은 빨간 색이야. 기다림 그리움 따위의 색은 분명 빨간 색일 거야.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조그만 게 별걸 다 아네.
오빠, 우체통이 왜 빨간 색인지 알아? 그 건 기다림의 색깔이 빨갛기 때문이야. 그리움의 색깔이 빨갛다는 의미이기도 해.
오늘 경아에게 이 오빠가 많은 걸 배우는데.
우린 그렇게 별을 헤다가 밤이 깊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경아는 예전의 경아로 돌아와 있었다. 경아는 내 친구 중에 미애를 무척 따랐다. 미애도 가끔 경아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집에 오기도 했다.
언니 우리 오빠 좋아해?
응, 넌?
난 오빨 좋아하지 않아.
좋아하지 않는데 왜 여길 와?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랑하거든.
호호 조그만 게. 암튼 경아는 언제 봐도 귀여워.
언닌 오빠 어디가 좋아?
어디가 좋긴, 그냥 친구니까 좋지.
경아는 태수 어디가 좋은데?
나를 담을 수 있는 넓은 가슴. 아마 오빠의 가슴속엔 경아 정도는 여러 명이 들어가도 꽉 차지 않을 거야.
태수 너 조심해야 겠다. 경아가 널 찍어 놨나 보다.
미애가 웃으며 말했다. 미애는 나에게 가끔 경아에 대한 말을 했다. 나이에 비해 무척 어른스러운 면도 있는 데 반해 너무 천진 난만해서 사랑스럽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난 미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미애의 말이 사실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경아는 이제 겨우 열 다섯 소녀였기에. 나에게 경아는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너무 사랑스러운 동생이자 친구였다. 이성의 감정을 느끼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았다. 나이 차이보다는 경아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나에게도 있었다. 만일 내게 애인이 생긴다 해도 지금 경아와의 정 보다는 깊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두 여자를 놓고 한 여자를 택하라 하면 난 당연히 경아를 택할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서든 한 사람만을 만나야 한다는 조건이 생긴다면 난 너무도 당연히 경아를 선택 할 것이었다. 경아를 향한 지금의 내 감정도 분명 사랑의 일종이었다. 사랑이라 해서 반드시 이성의 감정이 깃 들어야 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렇다. 난 경아를 사랑했다. 난 경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지독히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이성의 감정만 없을 뿐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경아에게 이성의 감정을 느끼게 될런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지독히 사랑스러운 동생일 뿐이었다. 경아도 나와 같은 감정일 것이었다. 나에 대한 감정이 미애의 말처럼 특별한 감정은 아닐 것이었다. 그건 말이 안되는 거 였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또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경아는 이제 겨우 열 다섯 소녀란 걸 난 알고 있었기에...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두고 미팅 제의가 들어 왔다. 일 학기 마지막 미팅이란 친구의 말에 선선히 응했다. 약속 장소에 나가서도 파트너가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파트너와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흥겨운 노래를 부를 때도 가끔 경아가 떠올랐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가 경아였으면 싶었다. 경아와 함께라면 더 즐거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주 잠깐씩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내가 파트너를 바래다 주고 집으로 향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있었다. 술이 거의 다 깨기는 했었지만 아주 조금은 내 의식의 일부를 잠식하고 있었다. 문은 그냥 열렸다. 방에 들어가자 경아가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조금 남아 있던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어떤 알 수 없는 감정이 내 전신을 휘 감았다. 무언가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확 솟구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난 경아를 안아 난 왜 경아를 잊고 있었을까.
경아가 올거란 걸 알면서도 난 왜 경아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경아는 어떻게 내가 미팅에 나간 걸 알았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잠들어 있는 경아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때 경아가 잠에서 기다리다 잠들었나 봐.
집에서 걱정 하시겠다. 잠 깼으면 빨리 가자.
어떻게 알았어?
아까 친구가 전화해서 알았지. 아직 안 들어 온 걸 보니 잘 된 모양이라며 부러워
하던데. 그저 그랬어. 난 네가 기다리다 그냥 갈 줄 알고 신경도 안 썼지. 경아가 계속 기다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왔을 텐데.
흥, 다른 여자 만나느라 경아는 안중에도 없었으면서. 만나서 여태 뭘 하느라 이제 들어 왔어?
그냥 놀았어.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난 경아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말해야 했다. 결국 다 듣고 난 후에야 경아는 나를 놔 줬다. 그런 경아가 너무 깜찍했다. 마치 바가지를 긁는 마누라 같았다. 난 다시 경아를 집에 바래다 주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 난 방학이 시작된 후 곧 바로 시골에 내려가 며칠 묶고 다시 올라 왔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뵙기 위해서 였다. 경아도 얼마 후 방학을 맞이했고 우린 거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극장에 가기도 했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소래에도 가끔 갔다. 즐거웠다. 경아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게 즐거웠다. 경아는 내 팔을 베고 눕는 걸 좋아했다. 가끔 내 방에서 내 팔을 베고 누워 잠들기도 했고 우리 학교 잔디 밭에서도 내 팔을 베고 누웠다가 그대로 잠들기도 했다. 더러는 경아의 침대에서도 함께 누웠다가 그대로 잠든적도 있었다. 경아의 부모님도 알고 계셨지만, 나를 믿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셨다. 아니 어쩌면 이상한 눈으로 볼일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경아는 아직 어렸고, 또 나는 경아의 오빠였으니까. 경아는 안개꽃을 좋아했다. 안개꽃을 보면 하얀 눈물이 떠올라 좋다고 했다. 이름처럼 안개를 닮은 안개꽃, 투명하진 않!
지만 하얀 슬픔을 떠올리게 하는 안개꽃, 한 송이로는 꽃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여러 송이가 모여야 만이 꽃의 기능을 발휘하는 꽃. 눈과 너무도 닮은 꽃. 한 송이 눈은 아름답지 않지만 수많은 눈송이는 가슴을 설레임으로 물들이 듯이 안개꽃도, 여러 송이가 모여야 비로서 안개가 되는 꽃. 경아는 그런 이유로 안개꽃을 좋아했다.
특히 눈을 닮아 좋아한다 했다. 난 길을 가다가 꽃집이 보이면 안개꽃을 사다가 경아의 머리에 꽂아 주기도 하고 한아름 안겨 주기도 했다. 경아는 나에게 안개꽃을 선물 받으면 너무 좋아했다. 여름에도 눈을 느낄 수 있는 꽃이라며 환하게 웃는 경아는 나까지 기쁘게 했다.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여름이 마지막 발악을 했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가을이 여름의 자리를 살며시 엿 보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여름은 쉽게 물러나기 싫은 듯 한낮엔 찌는 더위를 안겨 주었다. 그 무렵 경아는 내게 물망초 한 송이를 건네 주었다.
내가 널 잊고 말고 할게 어딨어? 넌 언제나 내 곁에 있는데. 잊혀지고 말고는 이별이 있은 뒤에나 얘기하는 거야. 오빠, 잊혀진다는 건 참 슬픈 일이야.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잊혀진다는 건 그 너 갑자기 왜 센티해진 것 같다.
요즘 나 공연히 눈물이 나와. 가을이 가까워져서 그런가 봐. 오빠, 우리 사랑이란 거 하면 안 될까?
임마, 너 심각하게 그러니까 이상하다. 내가 왜 어려? 쥴리엣과 춘향이는 나 보다 더 어린 나이에 로미오와 이몽룡을 난 경아가 좀 심각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경아가 지금 사춘기를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경아에게 가장 친한 남자는 나였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자도 나였기에 나에게 이성을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쉽게 대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아는 지금 가장 상처 받기 쉬운 사춘기 소녀였다. 더구나 경아는 내가 사랑하는 소녀였다. 이성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난 분명 경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 경아를 향한 내 감정은 사랑이란 단어 이외엔 달리 쓸만한 단어가 없었다. 경아가 원하는 사랑과는 좀 다른 색깔을 띠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내 감정도 사랑임에는 분명했다.
경아야, 난 지금 너에게 품고 있는 사랑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지금 이 상태로도 포화상태인데 이 감정 위에 또 사랑의 감정을 얹는다면 내 가슴은 터져 버릴 거야. 경아가 원하는 사랑은 경아가 좀 더 자란 뒤에 해도
오빠, 경아는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걸. 오빠가 생각하는 그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걸.
경아야, 사람은 누구나 세월이 흐르면 자라게 돼 있어. 그리고 그 세월은 그다지 길지도 않아.
바보,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빤 바보야.
난 경아의 말을 그다지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 사춘기 소녀가 흔히 할 수 있는 상상이라 생각했다. 나도 경아 나이 땐 부러지지도 않은 팔에 붕대를 감고 다닌 적이 있었기에 경아도 그런 거라 생각했다. 경아는 지금 떨어지는 낙엽에 까르르 웃을 수도 펑펑 울 수도 있는 그런 나이었기에...... 경아는 그런 내 생각이 옳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며칠 안 가 다시 밝아졌다. 까부는 정도가 좀 심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귀여웠다. 경아는 나에게 가끔, 있을 때 잘해, 따샤. 짜식, 튕기기는. 그런 말을 하면서 까불었다.
그리고 막 까불다가도 갑자기 심각해져서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기도 했다. 사춘기 소녀의 변덕이라 하기엔 좀 심했다. 하지만 나에겐 경아의 그런 모습마저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여름은 끝내 가을의 발길에 차여 계절 너머로 사라져 버리고 가을은 여름이 있던 자리를 독차지하고 들어 앉았다. 가을이 깊어 가면서 경아와 나의 만남이 좀 줄어들게 되었다.
오빠, 나 앞으로 자주 못 올 거야.
그리고 경아가 없어야 오빠가 경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될 거 아냐! 걱정 마. 오빠가 경아 보고 싶어 할 때 쯤 경아가 올 꺼니까.
그 후 경아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오더니 얼마 안가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 또한 바빠져 경아를 찾아 가기가 힘들었고 가금 찾아가도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아 만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볼 수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보고 싶었다. 늘 곁에 있던 경아가 없으니까 간간히 보고픔으로 떠올랐다. 아니 보고픔 보다 짙은 그리움이 살며시 밀려 들었다. 항상 그립지는 않았지만 문득문득 그리움이 찾아왔다. 경아는 가끔 물망초를 가져와 꽃말을 내게 확인하곤 했다. 난 여전히 사춘기를 앓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그 때까지도 더 큰 그리움이 남겨져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경아가 와야 하는 날 경아는 오지 않았다. 집에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도 오지 않았다. 집에 찾아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며칠 동안 계속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감이 습격했다.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밤이 깊었다. 하늘이 맑았다. 별들은 빛을 뽐내고 있었다. 난 문 앞에 앉아서 별을 헤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그리움으로 피어 올랐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 오더니 얼마 안가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침이 문을 열고 하루가 시작됐다. 지독히도 길고 지루한 밤이었다. 지독한 추위를 느끼기도 했지만 추위보다는 그리움에 더 아팠다. 아침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쯤 연락을 하려던 참이었네. 경아 지금 병원에 있어. 난 지금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해야 하니까 병원을 알려줄 테니 가 보게.
병원에 누워 있는 탓일까, 경아는 좀 수척해 보였다. 난 반가움과 그리고 슬픔이 복받쳐 경아를 끌어 안았다. 경아도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경아 엄마가 울먹이며 모든 것을 말해줬다. 난 들으려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들으려 경아는 나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였다. 지금까지 버텨 온 것도 기적이라 했다. 암이라 들은 것 같다. 혈액 암? 골수 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멍한 내 머리 속을 빙빙 도는 말은 경아의 삶이 며칠 남아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이제서야 그 동안의 모든 것이 이해됐다. 왜 경아의 부모님이 동생보다 경아를 더 위했는지, 철없는 동생이 경아의 말을 그렇게 잘 들었는지, 부모님은 왜 열 다섯 소녀가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고도 웃음으로 이해 했었는지. 난 내 마음의 순수를 알고 있었기에 그런 거라 생각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도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왜 물망초를 건네주며 꽃말을 얘기했는지, 자기는 더 이상 자랄 수 없다고 했는지, 밤 하늘 별을 헤며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이해가 됐다. 왜, 내게 사랑을 원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경아가 그토록 어른스러웠던 건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 고통을 이겨내고 순순히 받아 들였기에 경아는 그 토록 마음이 넓었던 것이었으리라. 난 그런 경아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 밤 늦도록 기다리는 경아를 두고 미팅을 했고, 어리다는 이유로 경아의 사랑을 거절했다. 거절은 아니었지만 경아가 원하는 사랑을 주지 않았다. 이성을 느꼈었는지도 모른다. 이성을 느꼈기에 가벼운 입맞춤도 못 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걸로 변명은 되지 않았다.
경아야,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진작 말했으면 오빠가 좀 더 신경을 썼을 텐데.
오빠, 미안해. 내가 말하지 않은 이유는 처음엔 두려움 때문이었어. 오빠가 날 피할까 봐. 좀 지나서는 동정으로 날 대할까 봐 가끔 암시를 주기도 했지만 오빠가 못 알아 들었잖아. 그래도 죽기 전에 오빠를 만나서 다행이야. 그동안 오빠 땜에 너무 행복했어.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 후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는 거 였어. 사랑은 어른들만의 것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 그 전에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곧 죽는다는 생각이 들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나도 키스 정도는 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 그리고 오빠가 경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도 알아. 그걸 알면서도 오빠에게 조른 이유를 이젠 오빠도 알 거야.
사흘 후 경아는 우리 곁을 떠났다. 경아가 죽기 전에 난 경아와 경아가 그토록 원하던 키스를 했다.
경아야, 사랑해.
오빠, 물망초 꽃말이 뭐지? 경알 잊지 말아요.
경아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물망초의 꽃말을 묻는 말이었다. 경아의 볼에 내 눈물이 떨어지고, 경아는 내 품에 안겨 엷은 미소를 띄우며 숨을 거뒀다. 경아는 죽기 전에 내게 일기장을 남겼다. 일기는 나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죽기 며칠 전 까지 이어져 있었다. 일기 내용은 온통 나에 대한 사랑으로 덮여 있었다. 일기의 끝은 언제나 "오빠, 사랑해." 로 마무리 되어 있었다.
경아는 이 이상 더 자랄 수 없는데 경아가 더 자란 후에 사랑하잔다. 경아에겐 시간이 얼마 없는데. 경아도 어른들이 하는 그런(?) 사랑은 싫다. 하지만 키스 정도는 해보고 싶다. 오빠하고 라면 얼마든지...... 오빠가 경알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가끔 투정을 부리는 것은 얼마 사랑하는 오빠와 헤어져야 하는 슬픔... 오빠의 가슴은 포근하다. 오빠의 팔베개를 베고 누워 있으면 너무 행복하다. 먼 훗날엔 다른 여자가 베고 눕겠지. 하지만 오빠, 경안 오빨 사랑해.
열 다섯 살 소녀의 가슴속에 피어 오른 사랑은 너무도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경아의 영혼을 바람결에 실어 보냈다. 난 아무도 모르게 경아의 뼛가루를 성냥갑에 가득 담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렸던 하늘은 기어이 눈을 토해냈다. 첫눈이었다. 경아의 말대로 빨갰다. 우체통의 색깔이 빨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떤 이별이든 그리움은 남아있는 사람의 몫이었다. 그리움은 살아 남은 자의 몫이었다.
벌써 경아는 내 가슴에 빨간 그리움으로 피어 올랐다. 내 상식의 틀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열 다섯 소녀에게 이성을 느끼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내 상식의 틀이 경아가 떠난 후에야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이미 가고 없는 경아에 의해서. 핏빛 그리움. 잿빛 서러움. 가슴이 아렸다. 경아와의 추억이 떠오르며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경아가 서러웠다. 이젠 경아를 추억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 가슴 아렸다. 어쩌면 삶은 공평한 것인지도 몰랐다.
죽음에 의한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은 살아 남은 자의 몫이니까. 제법 많은 양의 눈을 한 차례 토해놓은 하늘은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듯 눈을 토하지 않았다. 경아가 안개꽃을 좋아한 이유는 아마도 다시는 볼 수 없는 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가 필요했다.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소주를 마셨다. 몇 잔 마시자 술기운이 올랐다. 갑자기 그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랐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른 슬픔은 끝내 소리내어 울게 했고, 사무친 그리움은 오열하게 했다. 틀이 경아가 떠난 후에야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이미 가고 없는 경아에 의해서. 핏빛 그리움. 잿빛 서러움. 가슴이 아렸다. 경아와의 추억이 떠오르며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경아가 서러웠다. 이젠 경아를 추억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 가슴 아렸다. 어쩌면 삶은 공평한 것인지도 몰랐다. 죽음에 의한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리움은 살아 남은 자의 몫이니까. 제법 많은 양의 눈을 한 차례 토해놓은 하늘은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듯 눈을 토하지 않았다. 경아가 안개꽃을 좋아한 이유는 아마도 다시는 볼 수 없는 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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