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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 - 성철스님 시봉 이야기 2 본문
원택스님은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친구를 따라 찾아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가졌다. 일만 번의 절을 하고서야 겨우 얻은 좌우명은 ‘속이지 마라’ 한마디. 그 후 다시 찾아간 성철스님에게 “니 고마 중 되라”는 한마디를 듣고 1972년 출가했다. 혹독한 행자생활을 거쳐 계를 받고 성철스님을 곁에서 22년, 또 스님을 떠나보내고 난 후 23여 년, 이렇게 45년 동안 큰스님을 시봉하며 살고 있다. 원택스님은 “마음을 다해 시봉한다 했건만 돌아보니 큰스님을 보아도 보지 못한 것 같고, 만나도 만나지 못한 것 같다”는 말로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표현했다. 원택스님은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그것도 모자라 시커먼 보리 누룽지를 서로 먹으려고 장난을 하지. 그래도 그렇게 배고프게 살 때는 한철 지나고 나면 나도 깨달았다. 내 말 한마디 들어 보라며 깨달음을 토로하는 사람이 나온다 말이야. 그런데 그 뒤에 신도가 생기고 집도 좋은 집을 짓고, 양식도 꽁보리밥 신세를 면하고 좀 넉넉해지니까 공부 제대로 했다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와.
옛날 조사 스님들은 뭐든지 다 잘하셨제. 모두들 3장( 경율논의 세 가지 불교학 분야)에 능통했지. 공부 열심히 해야제. 그리고 옷은 다 떨어진 거 입더라도 마음은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된데이.
성철 스님은 불전을 원전으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어를 알아야 하고, 또 범어 공부를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어떤 교수에게 특별히 부탁해 저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되면 무한한 괴로움이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이른바 생사고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한한 괴로움을 어떻게 해야 벗어나며 해결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능력, 곧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활용하면 이 현실에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대해탈, 대자유의 무의 자제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포살은 사찰 내에 사는 모든 스님들이 보름에 한 번씩 모여 앉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고백하고 비판하고 참여하는 제도다.
1963년 8월에 발족된 대불련의 구도부가 만들어진 것은 1965년 5월이다. 불교를 단순한 교양이나 철학의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앙으로 키우고 실천하자는 뜻에서 일요일마다 서울 북한산 도선사에서 법회를 보고 있었다.
깨친다고 하는 것은 한 번 깨칠 때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성철 스님의 주장은 화두를 들고 참선해 전념, 한꺼번에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의 닦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까지가 중요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라는 엄정한 자기 관리의 가르침인 셈이다.
천하의 가장 용맹스러운 사람은 남에게 질 줄 아는 사람이다. 무슨 일에든지 남에게지고 밟히고 하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 칭찬과 숭배는 나를 타락의 구렁으로 떨어뜨리니 어찌 무서워하지 않으며 천대와 모욕처럼 나를 굳세게 하고 채찍질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 은혜가 아니랴? 항상 남이 나를 해치고 욕할수록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나는 그 사람을 더욱더 존경하며 도와야 한다. 이것이 공부인(수행자)의 진실한 방편이다.
성철 스님의 아이디어 중 특이한 것 하나는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마친 스님에게 산행을 시키는 것이다. 피곤하다고 누워 버리면 그 피로를 풀 수 없고 더 잠만 오고 건강을 회복하기가 힘든데, 등산을 갔다 오면 오히려 잠과 피곤을 빨리 이길 수 있다는 지론에 따른 것이다.
승려라는 것은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어떻게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내가 남을 이익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말합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오시오. 나를 찾아와서는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부처님께 절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000배 기도를 시키는 것인데,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절해라, 나를, 자기를 위해서 절하는 것은 거꾸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삼천배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의 심중에 무엇인가 변화가 옵니다.
변화가 오고 나면 그 뒤부터는 자연히 스스로 절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남을 위해서 절을 하는 것이 잘 안 되어도 나중에는 남을 위해 절하는 사람이 되고, 남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 되며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로 시작해서 음담패설을지나 끝내는 남의 허물을 들먹이며 입을 아프게 하는데, 그것만큼 실없는 일이 어디 있느냐는 의미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반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역사 이래 우리 문화재는 몽고 난 이후 신라 황룡사 9층 탑이 재가 되었고, 그 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또다시 수 없는 문화재와 사찰이 재가 되었으며, 근년에는 6.25 전쟁 이후 그나마 남아 있던 문화재와 사찰들이 재가 되었다. 그런데 해인사에 모셔놓은 팔만대장경판만은 오늘날 이렇게 기적적으로 잘 보존되어 오고 있으니 그때 조정해서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모시자고 한 사람은 누구일까? 결국 그 현명한 판단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지켜준 것이 아닌가?
해인사는 12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찰이다. 앞마당에는 1200년 된 3층 탑이, 뒤에는 200년 된 조선 후기의 대웅전이, 그 윗전에는 650여 년 된 조선 초기의 8만 대장경 판전이, 그 판전 안에는 750여 년 된 고려시대의 제조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는 유서 깊은 가람이다.
사방 40리나 되는 바윗돌을 백년마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그 옷자락으로 바위를 스쳐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것을 1겁이라 한다.
내가 수행자로서 평생을 살았는데 사람들은 내게서 자꾸 무엇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 실은 자기 속에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그것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나만 쳐다보고 사니 내가 중생들을 속인 꼴이다.
84,000번뇌라 하였는데 마침 일주일 절 양이 8만 4천 배니 84,000번뇌를 참회하고 없애는 법회가 되었다.
성철 스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라고 누누히 당부했으니 지금 우리가 일체 중생의 행복을 위해 살고 있느냐에 대해 자기를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마음으로나 물질적으로 남을 돕는 것이 참다운 불공이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되짚어보는 시간인 것이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이 나 홀로 걸어가노라. - 출가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