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ataBase
정혜윤 -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본문
고통의 무한함은 참아내기 힘들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바로 고통의 무의미함이란 걸 두 사람은 비슷하게 알아챈 것 같다.
상처에 매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는 사람, 상처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떠돌아다녀도 유목민이 아닙니다. 유목민과 다 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이주민은 혼동해선 곤란합니다. 오히려 유목민은 사막이나 초원처럼 불모의 땅이 된 곳에 달라붙어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목민은 떠나는 자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는 자입니다.
그 전까지의 나는 '콤플렉스가 뭐야? 불행이 뭐야? 왜 그렇게 비관적인데? 난 잘 이해 못하겠는데.' 이렇게 말하는 스타일이었어요. 마치 나에게는 나쁜일은 살아오는 내내 단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인생은 나에게만 우호적이고 장밋빛일 것처럼 군거죠.
그럴 때 책 속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돼요. 책을 읽으면서 캐릭터를 상상해요. 시나리오를 볼 때도 그냥 시나리오가 글로만 읽히면 아무리 좋아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읽는순간 벌써 필름이 돌아가고 영화찍고 있어야지 그 시나리오가 내 것이라고 생각해요.
가장 심각한 비관주의자가 어쩌면 가장 처절한 낙관주의자일 수 있다. - 장자
박노자는 후배들이 "꽃들이 난간 앞에서 웃어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같은 시를 감상할 줄 모르고 살게 된다면 그 또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지키지 못한 탓이라 생각한다.
천국의 백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위와 생식기가 없으리라.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모든 길 떠나는 자의 이야기, 모든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모든 동요하는 자들의 이야기에 항상 넋을 잃곤 했다. 그건 왜였을까?
이를테면 그의 어떤 소설에는 "나는 ㅇㅇㅇ를 봤다." 대신 "나는 ㅇㅇㅇ를 목격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라고 표현하는 할아버지가 나온다. 나는 처음 읽을 때부터 그 화법이 너무 재미있어서 좀 지리멸렬한 날은 그 표현을 패러디한다. 백퍼센트 확률로 훨씬 재미있어진다. 그 결과 그의 주인공들에게선 하나같이 광기 또는 꿈의 맛이 난다.
우리의 전 인생은 폴 오스터의 주인공들처럼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중일거다. 그렇게 뛰어가다가 아름다운 장면이 나오면 한 번 더 고개를 돌려 돌아볼 수 있을지 몰라도 아마도 우리는 계속 달려가게 될거다. 아름다움을 연출하진 못해도 감지해내기라도 하는 게 우리 몫이 아닐까 싶다. 달리면서 어느 날 하루쯤 잠깐 자기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 때의 숨이 진짜 숨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확실히 어떤 특정한 감정을 움직인다. 소설의 아름다움이 그러하듯이.
삶이 기다리는 것이라면 곁눈질하지 말고 기다리자. - 소로우
나의 인생 가운데 내가 다시 태어나도 기꺼이 다시 살고싶은 시간들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사람들의 성공은 그들의 평균 능력에 비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