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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2. 윤세진(채운) -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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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2. 윤세진(채운) -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사랑스런 터프걸 2009. 1. 8. 11:23
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채운 (그린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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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안에 더 많은 세계를, 더 많은 느낌과 감각을 담기!


나는 여전히 배우고 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안다. 그리고 '옳고' '확립된' 것을 고수한다. - 지가 베르토프
거지들도, 리즈테일러도, 대통령도 똑같은 맛의 코카콜라를 마시는 판인데, 왜 예술은 고급한 것과 저급한 것을 구분해야하지?(예술이 별거냐?) - 워홀
나는 일상생활과 즉각적인 연관성이 있는 예술을 추구한다. 일상생활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진짜 삶과 진짜 감정들을 아주 직접적이고 아주 진지하게 표현해줄 예술을 말이다. - 장 뒤뷔페
얼마나 많은 것이 아직도 가능한가! 그러니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 웃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대 멋진 춤꾼들이여, 활짝, 더욱 활짝 가슴을 펴라! 호방한 웃음또한 잊지말고! - 니체

예술-하다 그리고 예술가-되다!
천부적인 재능을 부여받은 천재(天才)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천가지의 방식으로 사용할 줄 아는 천재(千才)
사람들이 답이 주어지기만을 기다릴 때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자들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 안에서 만족할 때 자신의 한계를 실험하고 돌파하는 자들이다.
김득신은 자신의 무능력을 실험함으로써 무능력을 새로운 능력으로 전환시킨다.

지나친 감수성, 온몸을 던지는 관찰, 지칠 줄 모르고 나아가는 용기, 다른 모든 것들에 무관심할 정도로 한 가지에 집중하는 힘과 끈기

완성을 얘기하려면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할 터인데, 누가 그 기준을 세운단 말인가. 자연이 위대한 건 그것이 모든 생성을 긍정하는, 무한하게 열린 집합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를 만나더라도 접속할 수 있고, 그 누구와 접속하더라도 다른 의미를 생성시킬 수 있는 틈. 그 틈으로 인해 걸작은 마법처럼 다시 살아나 우리에게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선물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보고자 하는 만큼만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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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코트소매, 구두, 바지무릎, 엄지와 검지에 박인 못, 표정, 셔츠소매 

세계를 향해 자신의 신체를 열어놓고 그것들과 교감을 나누는 존재. 그들의 이름이 바로 '예술가'다.
세계를 향해 신체를 열고 온몸을 촉수로 만드는 것이며, 그런 자들만이 천 개를 보고 만 개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자신만의 사과

백척이나 되는 장대의 끝

산책하는 선, 머뭇거리는 선, 생각하는 선, 능동적인 선, 수동적인 선, 화난 선, 곡선을 만나 사랑에 빠진 선, 곡선을 만나 혼돈에 빠진 선...

그렇게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접속
그러니 움직여라, 그리고 접속하라!

no-where라는 뜻의 utopia가 now-here로도 읽힐 수 있다. utopia란 도달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만들어야 하는 곳이다.

낯선 감각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감각이 전해져오는 곳을 향해 신체를 열어보자. 혹은 익숙한 것들을 뒤집고 비틀고 쪼개서 낯설게 만들어보자.

새로운 감각과 가치를 담은 예술작품은 우리의 익숙함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런 다음, 속사포같은 질문들을 퍼붓는다. 니가 보는 게 보는 게 아니야, 니가 아는 게 아는 게 아니야
규칙들에 얽매이지 않는 그 과감함 때문에 예술이다.
자신의 시각으로 질문하기! 즐거운 예술은 질문을 통해 기존의 가치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 의심하라, 거침없이!

진리나 답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에게 말 걸어온 세계를 자신의 거짓말로 표현한다.

하나의 '절대적 시각'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역시 하나가 아니다. 내가 보는 세계와 다른 사람이 보는 세계의 다름과 그 다름의 공존을 인정하자. 그러면 다른 세계로의 넘나듦이 가능해질 테고.

리듬

두려워말고 어둠속으로 들어가라고, 거기서 침묵하지말고 노래하라고,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두려움을 기쁨으로 바꾸라고.

2월의 나무에서 봄을 맞는 호흡과 커다란 몸짓을 볼 수 있다면, 거기서 싹을 틔우는 봄의 힘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예술가! (르네 마그리트, 천리안)

사랑이란 상대방이 방출하는 모든 기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몸짓 하나가 우리의 해석의지를 마구 자극하는 것이다.

부족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욕망한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다. 무엇을? 살아있음을!

배움이 늘 질문을 동반하듯이, 질문은 항상 행위를 동반한다. 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만이 질문하기 때문이다. 질문하자. 우리는 지금, 여기서, 누구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지금 여기서 미래의 예술을 창조할 수 있을까?
행동하는 자들만이 질문한다. 행동할 때만 장애물을 만나고, 장애물을 넘으려는 의지가 있을 대만 질문이 샘솟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질문이 많은 것도 그들이 쉼 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볼거리와 먹거리들을 즐기는 '관광'은 일상을 벗어난 잠깐의 '도피'나 '머무름'일 뿐 여행이 아니다. 여행이란 다른 공간의 진동을 경험함으로써 다른 감수성을 갖는 신체로 돌아오는 떠남이다. 그럴진대 여행이란 제자리에서도, 심지어 꿈속에서도 가능한 법.

남들이 다 아는 외모나 학력 같은 것 말고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그의 매력을 낚아챌 때
내게 말을 건네는 작품을 응시하고, 그 작품의 매력을 찾기 위해 열심히 주변을 서성거리시라. 그러다보면, 어느순간 그 작품과 두터운 우정을 나누게 되고, 그 첫 만남을 통해 또 다른 만남들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실험이야말로 우리의 다양한 욕망과 실패, 용기, 질문을 통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실험을 할 때마다 새롭게 생겨나는 질문들과 실패 후에 얻게되는 지혜들에 기뻐할 뿐,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칭찬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거니와, 비난 때문에 그만둘 일이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험하는 자는 섣부른 기대나 절망에 사로잡히는 대신, 실험하는 순간 자체의 환희에 들뜨고 행복해한다.

모든 걸 아는 척하면서 거드름 피우는 어른보단 장난치고 도망가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어쩌면 이거야말로 길 위의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능력이 아닐까.

모두가 줄을 서서 같은 방향으로 걸을 때 끊임없이 줄을 이탈하고 딴 곳을 쳐다보는 것, 그 모든 행위가 예술일 수 있다. 이런 예술은 스트레스를 모른다. 게걸스럽게 배우고, 미친듯이 표현하며, 진리나 권위의 무거움에 질식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은 건강이고, 건강해지기 위한 싸움이다!

자신의 능력이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시작하고는 싶으나 두려움이 앞선다면, 밴드를 조직해 보시라.

예술은 그처럼 누군가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첸카이거의 황무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은 게 아니라, 자신이 감지하고 반응하고 행동하는 만큼이 자신의 세계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공명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세계는 넓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아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덤덤한지, 또 무엇을 만나면 기쁘고 무엇을 만나면 슬픈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지를 아는 일이다. 거미처럼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미세한 떨림들을 번개처럼 포착하는 일이다.

예술은 우리 밖의 세상에서 시작되는 것도,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과 마주칠 때 비로소 시작된다.

현실을 도피하거나 현실 너머를 꿈꾸는 게 아니라 현실 속으로 뛰어드는 것. 자신이 있는 자리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롭게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 그거야말로 참된 예술이 아닐까?

한탄이나 원망 대신 평온한 열정으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나'란 그렇게 변하는 내가 매일 변하는 세계를 만남으로써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존재임을 긍정하는 사람들에겐, 삶 자체, 이 세계 자체가 예술이 아닐까?
자신의 행동을 통해 웃음을 만들어내고 상황을 변화시킨 윌로씨를 보라.

어떻게 자신의 몸짓으로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과 함께 행복을 만들었는지.

그저 의식만 진보적인 척 하는 것일뿐, 그의 신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