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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이 당신을 말한다. 본문
Flaubert도 그랬다,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하나의 단어가 있을 뿐이라고.
우리의 소통을 방해하는 noise에는 물리적 잡음, 심리적 잡음, 의미적 잡음이 있다.
시끄러운 소리, 피로나 배고픔 같은 물리적 잡음, 선입견이나 편견같은 심리적 잡음, 사회문화적 차이인 의미적 잡음 등이다. 재미난 것은 소통의 구성요소에 잡음이 버젓이 들어가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잡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줄이고 피하기 위해 노력하며 소통해야하지, 잡음없는 진공상태는 실험실 소통이며 실제 상황에 그런 이상적 소통은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병과 아픔도 그와 같은 것이리라. 살면서 함께가는 것이다. 병을 너무 심각히 여기고 싹을 잘라내야 하는 것으로만 여겨 처방한다면 삶은 더 고달플 것이다. 나는 삶과 병을 눙칠 수 있는 여유를 그 공간에서 배웠다.
표현하지 않고서야 어찌 견딜 것인가. 표현되지 않고서야 어찌 배길 것인가.
타인을 배려하는 소통은 중요한 것이지만, 타인의 눈치를 보는 소통은 진정한 소통이 되기 어렵다. 이런 걸 알면서도 어느 순간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게 아니라 눈치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타인에게 말 걸기가 심하게 어렵게 느껴진다면, 초심으로 돌아가보자. 난 원래 무엇을 묻고싶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그 주제는 상대와 세상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메세지는 언어 자체에 있지 않다.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다.
누구도 자신의 말 바깥 영역에 있지 않다. 말 안에 자기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라봤자 결국 같은 인간종이며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같아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해 준다.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크고 깊은 소리를 내 버릇해야 평상시나 발표하는 긴장된 순간에도 자신의 진성을 편안히 낼 수 있다. 큰 소리를 낼 줄 알면 작은 소리도 낼 수 있지만, 작은 소리만 내 버릇하면 큰 소리를 낼 수 없다.
남의 말을 들을 때 자꾸 딴 생각이 나는 건 당연하다.
우리는 1분에 600단어를 들을 수 있는데 말은 1분에 100~140 단어가 가능하니 듣는데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 여분의 시간을 생산적으로 써보자. 첫째, 내 말로 바꿔가며 듣는다. 둘째, 이 지식이 필요한 순간을 떠올리며 듣는다. 스스로 필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셋째, 다른 관점을 생각해가며 듣는다.
모든 세상의 말들을 이해하려 애쓸 것이 아니라 내가 들을만한 말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태도다.
섬세하게 상대의 cue를 읽는 사람이 더 만족스런 친구관계를 맺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둔하든 민감하든 비슷한 정도의 섬세함과 정교함을 가진 사람들간의 우정이 가장 만족도가 높다.
의미는 언어에 있다. 아니다. 의미는 말 자체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에게 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을 나 먼저 환대할 수 있어야 할텐데. 그 일은 나 자신의 과거와 하루를 제대로 마주하는 데서 출발한다. 나의 과거를 만나 그 뿌리에서 나온 눈물겨운 나의 현재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와 환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일터에서 진정한 주인공이란,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진 자로구나. 그것이 '마니아'인 것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