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 : 현실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매일
뉴스를 들을 때마다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마치 인류 최후의 순간을 맞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양심이 없는 과학은 이렇듯 인류에게 위험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새로운 영적인 방법론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요.
'스님' (베르베르는 '스님'이라는 발음을 한국어로 하려고 노력했다.)께서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현각 : 나는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희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는 미래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있는 지금에서 출발합니다. 현재에
충실하면 현재가 쌓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묻지 마세요.
베르베르 : 내 작업은 주로 미래에 대해 얘기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 뇌를 움직이는 동안은 지금 이
순간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무엇인지,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식도, 양심도 없는 물질문명의 미래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시작과 끝은 같은 것… '현재'에 충실해야
현각 : 예수님께 누군가 물었지요. “마지막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럼 당신은
시작은 어땠는지 이해하고 있나요?"라고 되물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시작과 끝은 같은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결국'현재'라는
시간의 다른 모습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베르베르 : 현재는 그럼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현각 : (대답 대신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려쳤다.)
베르베르 :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세요.
현각 : (다시 탁자를 손으로 탁 친 뒤)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르베르 : 그렇다면 수백 년 전에 그려진 '모나리자'를 현재의 우리가 바라보며 감명을 받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현각 : 좋은 지적이에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과거의 현재를 보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리면서 완벽하게 '현재'에 충실했기 때문에 우리가 감명을 받는 것입니다.
베르베르 : 스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을 이제 조금 알 듯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할
때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글 속에 빠져듭니다.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하지요. 명상을 하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현각 : 그게 바로 명상입니다. 당신은 컴퓨터로 일하는 승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냥 보통
승려이고요.
베르베르 : 스님은 전생에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각 : 신부이거나, 승려이거나 그런 영적인 일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요. 나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가톨릭 신자였고 지금은 머리 깎고 승려가 됐지만 내 자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베르베르 : 가톨릭 신자였던 당신이 불교를 접하고, 문화와 관습이 다른 나라 한국에서 승려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현각 : 어려움도 물론 있었지요.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나의 스승이신 숭산 스님으로부터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그런 질문을 누구도 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그'엄청난'질문은 나를 한국으로 이끌었고 내 종교생활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베르베르 : 바보 같은 질문을 한가지하고 싶습니다. 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
아닌지요?
현각 :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이렇게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세상에 있되 집착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얘기지요.
베르베르 : 무저항과 비폭력, 명상으로 어떻게 세상의 악을 물리칠 수 있는지요.
현각 : 지금 우리 두 사람이 앉아서 차를 마시는 이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창 밖의 새 소리를 듣고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베르베르 : 티베트의 많은 승려들은 중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종교가 그들을 죽인 셈인데….
현각 : 그들은 종교로 인해 목숨을 잃었지만 이 생에서 몸이 사라진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물질(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참 나(眞我)'에 있는 것입니다.
●관조하는 자세가 바로 불교
베르베르 : 스님께선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현각 : 순간적으로 위험이 닥쳤을 때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신적인 두려움은 없습니다. 어떠한
두려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어 있거든요. 아무것도 없어요. 멀리서 보면 구름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그냥 물방울인 것과 같습니다.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이 라마도 두려움이나 욕망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인식하지 않을 뿐이지요.
베르베르 : 감정을 다스리시나요?
현각 : 아니요.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고통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나도 명상을 처음 할 때 가부좌를 하느라 다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도 '아프다.'는 사고(思考)에 의해 생긴
것이거든요.
(펜을 집어 들면서) 이 펜을 이렇게 보면 길게 보이지만 돌려서 보면 둥근 점이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다르게 보면 고통은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통은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Pain is not pain, but pain is pain). 관조하는 자세, 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